< Previous핵심광물 육성정책 동향 Resources Recycling Vol. 34, No. 4, 202598 4 시사점 □ 글로벌 핵심광물 재자원화산업 육성 경쟁 점화 ◦ 탈탄소 ․ 에너지원 ․ 공급망 패러다임 전환으로 핵심광물 확보 경쟁 심화 ◦ 핵심광물 공급망 확보를 위한 현실적인 대안이자 新자원공급원으로서 재자원화산업 부각 ◦ 글로벌 주요국들은 다양한 정책 및 지원제도를 통해 핵심광물 재자원화산업 육성 추진 <주요국 정책 및 지원제도의 특성> 국가특성 EU ○ 핵심원자재 재자원화에 특화된 법규 제정 ○ 재자원화된 원료사용에 강행성을 적용하여 재자원화 촉진 독일 ○ EU 정책과 연계하여 재자원화 정책 추진 ○ 국가 차원의 전략 수립을 통해 산업 육성 미국 ○ 큰 내수시장,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직접투자, 보조금, 세제 혜택, R&D, 동맹국間 협력체계 구축 등 다양한 방식으 로 산업 육성 중국 ○ 큰 내수시장, 풍부한 자본, 저렴한 노동력 등을 바탕으로 정부 및 국영기업 주도의 산업 육성 일본 ○ 재자원화 선진 기술 및 발달된 민간 생태계 중심으로 산업 旣활성화 ○ 재자원화 생태계가 구축되어 제3국으로부터의 재자원화원료 확보에 중점 □ 국내 핵심광물 재자원화산업 육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 및 제도 마련 필요 ◦ 우리나라는 원료를 수입 , 가공 , 제품화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제조업 기반의 산업구조 * 임에도 핵심광물 특정 국 수입 편중 * GDP 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OECD 회원국 중 한국 (28%) 이 가장 높음 <주요국 GDP 대비 제조업 비중><국내 핵심광물 국가별 수입 비중> ◦ 美 , EU, 獨 , 中 등 주요국에 비해 핵심광물 수급리스크는 높은 반면 , 핵심광물 재자원화산업 육성을 위한 지원제도는 부족한 상황 ◦ 투자 , 융자 , 보조 , 세제혜택 등 다양한 지원제도 도입을 통해 국내 주력산업 ( 반도체 ․ 이차전지 ․ 전기차 등 ) 경쟁력 우 위 확보 필요한 시점 ◦ 특히 , 대부분의 주요국들이 운영하고 있는 보조 지원체계 구축 ․ 추진 필요 □ 배터리外 다양한 재자원화원료(사용후 제품, 공정부산물)에 대한 기술 개발 촉진 필요 ◦ 우리나라는 지원제도 , 기술개발 등이 배터리 재자원화에 집중 , 전방산업 중요도 및 대외의존도 , 공급망 리스크가 높은 영구자석 ( 희토류 ), 폐촉매 ( 희토류 ․ 백금족 ), E-Waste(Ni ․ Cu ․ Ga 등 ) 재자원화에 대한 지원제도 마련 및 기술개발 필요핵심광물 육성정책 동향 99 자원리싸이클링 제 34 권 제 4 호 , 2025 참고 핵심광물 재자원화산업 육성 주요국 법규 및 제도 구분법규제도 미국 ○ 인프라투자고용법(’21) ○ 국방물자생산법(’22) ○ 인플레이션감축법(‘22) ○ 국방수권법(‘24) ○ 첨단 에너지 제조 및 재자원화 보조금 프로그램 ○ 배터리 및 핵심광물 재자원화 보조금 프로그램 ○ 생산시설에 대한 융자/보증 지원 EU ○ EU폐차지침(‘00) ○ EU배터리법(’23) ○ EU핵심원자재법(‘23) ○ 그린딜산업계획(‘23) ○ EU에코디자인 규정(‘24) ○ 원자재 아카데미 설립 ○ 전략적 프로젝트 선정 ○ 유럽투자은행 투자/융자 지원 ○ LIFE 프로그램 독일 ○ 국가순환경제전략(‘12) ○ 원자재전략(‘19) ○ EU배터리법(’23) ○ EU핵심원자재법(‘23) ○ 그린딜산업계획(‘23) ○ EU에코디자인 규정(‘24) ○ 원자재펀드 ○ UFK 보증 ○ 연방경제기후보호부 자금지원 프로그램 중국 ○ 순환경제발전전략 및 단기 행동계획(‘13) ○ 생산자책임제도(‘16) ○ 제14차 5개년 순환경제발전계획(’21) ○ 자원순환 및 재활용 강화 방안(‘24) ○ 배터리 회수이용 시장 진출 기업 지원 ○ 중앙․지방정부 보조금 지원 일본 ○ 순환형 사회 형성 촉진 기본법(‘97) ○ 경제안보보장추진법(‘22) ○ 일본 석유, 가스 및 금속 국가 공사법(’22) ○ 자원의 유용한 이용의 촉진에 관한 법률(’22) ○ 핵심광물 보조금 프로그램 ○ 자율형 자원순환시스템 강화 실증사업 ○ 경제환경 변화에 따른 중요 물자 공급망 강화 지원 사업 ○ 자원 자율경제 시스템 개발촉진 사업 ( 작성 : 한국광해광업공단 김채린 주임 )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4, No. 4, 2025100 실버타운에서의 독서편력(遍歷)(3) - 춘원 이광수는 항일운동가였다 - 연세대학교 오재현 명예교수 2023 년도는 이병주 소설에 매달렸던 한해였고 , 2024 년도는 춘원 이광수 소설에 매 달린 실버타운의 한해였다 . 실버타운 A 동 로비에 설치된 도서실 서가에 박노신 회원 이 기부한 “ 춘원 이광수전집 ” 코너가 있다 . 2020 년 태학사에서 출판한 이광수 장편소 설 21 권 중 16 권이 꽂혀있었다 . <무정> , <유정> , <그의 자서전> , <흙> , <사랑> , <마의 태자> , <이순신> , <단종애사> , <개척자> 등을 읽었다 . 그리고는 “ 이광수 ( 李光洙 ) 의 소 설을 읽다 ” 라는 칼럼을 써서 실버타운의 월간소식지 (Senior Magazine) [ 행복한 동행 ] 2025 년 3 월호에 게재하였다 . 나는 이 칼럼 말미에 “ 춘원 이광수는 논객이고 언론인이고 , 소설가이며 , 독립운동 가라고 하나 더 보태면 안될까 ?” 라는 아쉬운 나의 심정을 담았다 . 이광수는 30 년 가까 운 장구한 세월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는데 , 8.15 광복 전 4~5 년간의 친일행위로 친일 파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 그것이 안타까웠다 . 이광수는 1910 년 (19 세 ) 3 월 , 일본 메이지 학원 중학 5 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오 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이 105 인 사건으로 투옥되자 이광수 는 학감을 맡아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 이광수의 애족 운동 , 항일운동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이광수는 1914 년 (23 세 ), 시베리아 바이칼주의 수도 치타에서 교포들이 발행하는 월간지 「 대한인정교보 」 의 편집 ․ 주필 을 맡았고 , 1919 년 (28 세 ) 8 월에는 중국 상해 ( 上海 ) 에서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기관지 「 독립신문 」 을 창간 ,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였다 . 1923 년 (32 세 ) 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두 차례 편집국장 자리에 있었으며 , 1933 년 (42 세 ) 에는 조선일보 부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 춘원 이광수는 신문사에 몸을 담고 , 지병과 가난과 탄압과 싸우면서 꾸준히 논설과 소설을 연재하였다 . 그리고 민족의 식을 깨우쳤으며 , 농촌계몽 운동과 농촌자립운동을 추진하였다 .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문맹 퇴치 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 하였다 . 조선 인구의 90% 에 달하는 문맹을 타파하고 한글을 보급하여 민족정신을 선양하려는 것은 실천적인 항일운동이 었다 . 한편 춘원 이광수는 1917 년 (26 세 ) 에 소설 「 무정 」 을 쓰기 시작하여 , 1936 년 ~1937 년 소설 「 이차돈의 사 」 , 「 애욕의 피안 」 , 「 그의 자서전 」 등의 소설을 끝으로 많은 소설을 집필하였다 . 이광수가 소설을 쓰는 근본 동기는 민족의식과 민족애의 고조 , 농촌계몽과 교육이라고 밝히고 있다 . 그리고 그의 소설은 민족자립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 춘원의 소설은 많은 젊은이에게 청운의 꿈을 키워주기도 하고 민족적 울분을 삭여주기도 하였다 . 연세대학교 송복 명예교수는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은 민족교육과 외교라고 말하고 있다 .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 결된 1910 년을 전후해서 많은 애국지사가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30 여 개의 항일군사단체가 조직되었다 . 무력으 로 일본을 제압하고 독립을 쟁취한다는 투지는 뜨겁지만 , 문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였다 . 1920 년 중국 귀주 ( 貴州 ) 군관 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혁명군 장교가 된 김홍일 ( 金弘壹 , 1898~1980) 의 증언을 통해서 항일무장독립군 실상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 김홍일은 한국독립군에 소속되어 일본과 투쟁하기 위해서 1921 년 3 월 장백산 일대에서 자유시로 이동을 준비 중이던 춘원 이광수(1892~1950)주암칼럼 101 자원리싸이클링 제 34 권 제 4 호 , 2025 대한독립군비단과 만났다 . 그의 눈앞에 나타난 군비단은 장교 2 명 ( 사령관 임표 , 신흥무관학교 출신 조경호 ), 병사 255 명으로 구성되 어 있었다 . 그런데 무기는 일제 소총 21 정과 권총 3 자루 , 수류탄 두 어 개뿐이었고 , 복장도 낡은 한복차림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맨주 먹의 부대였다 . 병사 12.1 명당 소총 한 자루꼴이었으니 무장부대 라고 칭하기 민망할 수준이었다 . 임정 산하의 독립군 실상이 이정 도 수준이었으니 “ 우리의 무기는 붉은 주먹뿐 ” 인 심정이 답답하였 다 . 계란으로 바위를 가격하는 것으로 귀중한 인재를 잃기만 하고 얻는 것은 없으니 , 과연 한국인들의 항일무장 독립운동은 현실적 이었는가 ? 실현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만을 추구하거 나 감정에 치우친 운동이란 비판도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할 때 , 송복 교수의 효과적인 독립운동론 , 이광 수의 문맹 퇴치 운동과 농촌계몽과 자립운동 등이 얼마나 값진 독 립이론이고 , 얼마나 값진 독립운동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 이광수가 친일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1938 년 11 월 3 일 명치 절에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백원을 헌납한 것이 시초이다 . 동우회 사건의 재판에 계류 중이고 병약한 체질의 이광수로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 1940 년 (49 세 ) 2 월 11 일 , 이광수는 가야마 미쓰로 ( 香山光郞 ) 로 창씨개명하고 2 월 20 일 자 매일신보에 「 창씨와 나 」 를 게 재하여 공개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 소설가 김동인 ( 金東仁 , 1900~1951) 은 20 년간을 민족주의적 지도자로서 자타가 허락하던 이광수가 전향한 것은 동우회 40 여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훗날 회고한 글이 있다 . 나는 이광수가 어떤 친일을 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 서울 부민관에서 또는 동경에서 조선인전문학교 학생 , 대학 생을 향하여 “ 학도지원병 ” 에 가도록 권유한 연설을 한 것을 알고 있다 . 당시 나는 중학교 하급 학생으로서 이광수의 애타 는 연설문을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삼삼하게 떠오른다 . 당시 조선은 일본 하늘 아래 생활하고 있어 신궁 참배 , 창씨개명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 중학생인 나를 포함하여 우리 친구들도 일본의 소년항공병 , 요카렌 ( 予科練 ) 등에 관심이 많았고 , 또는 동경하기도 하였다 . “ 학도지원병 ” 참가 권유 연설이 이광수의 대표적인 친일행위이지만 이광수의 연설을 듣고 , “ 학도지 원병 ” 에 지원한 전문학생 , 대학생이 얼마나 되는지 의심스럽다 . 1944 년 일본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 학도지원 적격자는 모두 6,101 명이며 , 그 가운데 4,610 명이 지원을 하고 , 1491 명 이 지원을 회피하였다 . 그리고 적성검사 합격자는 3,050 명이었다 . 이 같은 학도지원의 실태는 무조건 강제된 것이 아니였 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 학도지원병은 입영 이후 간부후보생을 지원해 일본군 초급장교로 입신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 다 .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군 장교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과 같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이광수의 “ 학도지원병 ” 권유 연설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했겠는가 . 「 99 인 친일파 인명사전 」 이라는 책에 우리나라 민족지도차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다 . 김성수 , 최남선 , 이광수 , 진학문 등 이며 , 그 외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 송복 교수는 그의 글에서 김성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 김성수는 교육으로 , 실제로 나라를 되찾고 일으키는 실효 ( 實效 ) 가 나타나는 독립운동을 한 분이다 . 더러는 일제 말기 인촌 선생이 일제에 아부했다 , 훼절했다고 하는 폄하도 하지만 , 이는 중세인의 의 ( 義 ) 의 눈으로 본 것이고 , 근대인의 효 ( 効 ) 의 의식으로 보면 조금도 누가 될 것이 없다 . 」 2025 년 3 월 10 일 ( 월요일 ) 조선일보에 김윤덕 선임기자가 ‘ 칼 이야기 ’ 를 펴낸 최명 서울대 명예교수와 인터뷰한 기사가 실려 있다 . 최명 교수는 1940 년생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 후 ,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 서울대 정치학 와세다대학 재학시절(1918년경). 왼쪽부터 이광수, 정노식, 진학문, 정노식은 이광수와 도쿄 유학생 시절 같은 하숙에 있었다.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4, No. 4, 2025102 과 교수로 30 년 넘게 재직하였다 . 그의 인터뷰 기사 발언 중에서 다음 세 가지가 내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 – 젊어서는 박정희를 싫어했지만 그만한 지도자도 없었다. – 사람이 매회 달리 보이는 건 늙어서가 아니라 학문과 인격이 발전했기 때문이어야 한다. – 나는 기미독립선언서를 한자도 빠트리지 않고 외운다. 29세 청년 최남선이 쓴 피 끓는 명문( 名文 )을 다시 읽어보기 바 란다. 최남선 같은 이를 친일로 매도하고 짓밟는 짓이 우리의 좁은 마음이다. 내가 대선배로 섬기고 존경하는 진학문 ( 秦學文 , 1894~1974) 선생은 한때 만주국 ( 滿洲國 ) 의 고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친일파로 낙인이 찍힌 분이다 . 그러나 만주국 고관 시절 100 만 우리 동포를 음으로 양으로 도운 숨은 애국애족의 거인이 다 . 특히 우리 동포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인 ( 주로 군인 ) 과 싸워서 바로 잡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 만주국 고관이기 때문에 학대받고 천시당한 우리 동포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 또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 그 당시 만주에 사는 우리 교포는 진학문 선생이 친일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 대만 ( 臺灣 ) 은 우리나라보다 더 긴 기간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다 . 대만의 전 총통 이등휘 ( 李登輝 ) 는 대학생 시절 학 도병으로 일본군에 참전한 것을 자랑으로 하고 있다 . 대표적인 친일파의 아들인 고진보 ( 辜振甫 ) 는 대만 경제인의 우두머 리로 , 또 대만 정부 요직으로 활동이 많았다 . 그러니 대만에는 친일파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 대만사람이 모두 친일파라 서 , 대만에 불이익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대만이나 우리나라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순응해서 사 는 것이 일반 국민의 생활이었다 .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순응했다고 해서 친일파는 아니다 . 또 친일을 했다고 해서 우리나 라에 불이익을 안겨주지 않았다면 친일이 나쁠 것도 없다 . 나는 이광수의 친일행위가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해로운 영향을 미쳤는지 잘 알지 못한다 . 설혹 비판을 받아 마땅한 친 일행위라 하여도 그가 장구한 세월 동안 피땀 흘려 쌓아 올린 애족 , 애민 , 항일운동에 비할 수 있겠는가 . 그래서 , 춘원 이광 수는 논객이고 , 언론인이고 , 소설가이며 , 독립운동가라고 하나 더 보태면 안될까 ? 하고 주장을 해본다 . 이 칼럼에는 정진석 저 <언론인 춘원 이광수 , 2017 > , 이영훈 외 저 <반일 종족주의 , 2019 > , 이영훈 외 저 <반일 종족의 역사 내란 , 2025 >의 도서에서 많을 글을 따왔음을 밝혀둔다 . (2025. 5. 1. 기 )주암칼럼 103 자원리싸이클링 제 34 권 제 4 호 , 2025 내 친구 이상희(李相禧)(1) 연세대학교 오재현 명예교수 ◎ 중학교 시절 상희야 또는 희야라고 , 자네를 불렀는데 , 오늘은 이 교수라고 그리고 네가 아닌 자네라고 부르겠네 . 높은 하늘나라에 있으니 호칭도 좀 격상해야 하지 않겠는가 . 내 일모레 7 월 9 일이 자네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만 15 년이 되었네 , 세월이 정말 빠르지 . 자네가 떠나면서 나에게 고독과 외로움이란 선물을 안겨주었네 . 아내도 없고 , 친구 도 없는 실버타운의 초고령자 독거생활은 뼛속까지 외로움이 스며드네 . 만일 자네 가 살아있다면 내가 이렇게 외로울 수 있겠는가 . 자네는 1929 년 4 월 29 일에 태어나고 나는 같은 해 4 월 3 일에 태어났지 . 한 ‧ 일합 방부터 19 년 후이고 , 3.1 독립운동으로부터 10 년 후이지 . 우리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 일본사람의 생각이 좀 넉넉해서인지 , 1, 2 학년 시절에는 조선어 시간이 있었 고 조선어 교과서도 있었네 . 우리는 일본 하늘아래서 그리고 일본 통치의 그늘에서 살았지만 , 우리가 어릴 때라 무엇을 알았겠는가 . 그냥 일본사람이 시키는 대로였지 만 평화스러운 시대가 아니었던가 하는 기억이 있네 . 중학교 시절 일본이 다급해서 몹쓸 짓을 많이 했지만 우리는 나쓰메 소세키 ( 夏目 漱石 , 1867 ∼ 1916) 의 소설을 읽으면서 또 이시카와 타구보쿠 ( 石川啄木 , 1886 ∼ 1912) 의 다음과 같은 서정시를 읊으면서 10 대의 감수성을 키웠지 . 장난삼아 어머니를 등에 업고 그 너무 가벼워서 울어 세 발짝을 못 떼다. 여담이지만 8·15 광복 후에도 일본 교과서로 공부했고 , 일본과 얽힌 인연으로 평생 일본 책에서 못 벗어나 , 자네나 나나 일본어가 모국어처럼 돼버렸네 . 중학교 시절 자네는 그림을 잘 그렸네 . 미술대학에 진학할 것이고 , 명성이 높은 화가가 될 것으로 우리는 다 기대했었 지 , 예술가답게 성격이 깔끔하고 , 화려하지는 않아도 돋보이는 옷차림이었지 . 또 하나의 기억은 진주시 봉래동 비봉산 아 래의 자네 집에 가끔 놀러 간 것이고 , 자고도 왔지 . 1946 년 4 학년 때가 아닌가 싶네 . 자네 모친의 다정한 대접과 훌륭하신 인품은 지금도 잊히지 않네 . 어머니가 없는 내가 자네를 얼마나 부러워하였는지 아는가 . 그때는 몰랐지만 , 자네 자당 ( 鄭崗 정강 ) 께서는 많은 한글 소설을 필사한 문학인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네 . 선문대학교 고전문학 전공 양승민 교수가 작성한 「 정강 ( 鄭崗 ) 여사가 필사한 한글 소설 」 을 읽고 , 자네 자당께서 문학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었네 . 자네가 자당 묘비에 새긴 아래와 같은 글에도 자당이 여류문학인이었음을 알 수 있네 . 「 鄭崗 (1901.1.28. ∼ 1949.12.8.), 慈堂께서는 용모가 청순하셨으며 독서를 즐기셨다 . 16 세에 시집오실 때 수필 본 문학 서적이 수개 함에 달했다 . 시모께 효도하셨으며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 . 」 이제는 사돈의 팔촌 같은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네 . 우리 큰 형수 씨 ( 안동권씨 ) 는 내가 태어날 무렵인가 , 그 전인가 확실 이상희(1929∼2010)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4, No. 4, 2025104 치 않지만 , 산청군 단성면 강루에서 우리 집으로 시집을 왔네 , 처녀 시절 문학소녀로 , 동아일보에 연재한 이광수 소설을 애 독하셨다고 들었네 . 신문이 배달되는 시간에는 대문 밖에서 기다렸다고 하셨네 . 그 형수 씨의 친정 어머님이 이 교수의 엄 친 ( 이판수 ) 의 고모 , 그러니까 자네에게는 대고모가 되시네 . 자네 엄친과 우리 큰 형수 씨는 내외종 간으로 , 우리 큰 형수 씨의 외갓집이 바로 자네 집이었네 . 우리 어머니와 자네의 대고모 , 즉 어머니의 사돈 그리고 우 리 서모 등 3 인이 해인사에 가서 스님을 양쪽에 세우고 해인 사 계곡에서 촬영한 기념비적인 사진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 하고 있네 . 옛날에는 여식이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으로 친정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이 유가의 법도 아닌가 . 또 우리도 사돈의 팔촌 같은 촌수를 따지는 나이가 아니라 두리뭉실하게 넘어 갔지만 , ‘ 상희를 한번 데리고 와요 ’ 라고 하시던 큰 형수 씨의 말씀은 80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네 . ◎ 대학교시절 혼돈과 암울한 1940 년대의 마지막 해인 1949 년 6 월에 우 리는 중학교 (6 년제 ) 를 졸업하고 자네는 북 ( 서울 ) 으로 , 나는 동 ( 일본 ) 으로 떠나 헤어지게 되었네 . 6.25 사변의 꼭 1 년 전이 었지 . 일본에 오면 공부시켜 주겠다고 하신 사업가 아저씨 ( 오 병수 ) 를 의지하여 나는 그해 8 월 , 1.5 톤 어선을 타고 일본 九 州에 상륙하여 동경의 아저씨 집을 찾아갔네 . 드라마틱한 이 밀항기를 글로 담기에는 너무 힘든 모험이었지 . 그 당시 한 ‧ 일간 국교가 없으니 일본가는 방법으로 밀항을 택할 수밖에 없 었네 . 지금 생각해보니 어떻게 그런 용기를 가졌는지 꿈만 같네 . 우리 세대는 한두 번 다 사선 ( 死線 ) 을 넘어 살아남았고 , 나 도 예외일 수는 없는가 보네 아저씨는 나를 하꼬네 ( 箱根 ) 별장으로 데리고 가는 등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네 . 오래전 일본에 건너온 아저씨는 고생 끝에 철스크랩업 ( 木下商店 ) 과 기계공업 ( 朝光工業株式會社 ) 으로 대성하여 재력이 단단하였지 . 우리 집과는 촌수가 좀 있었 지만 , 양가가 수 대를 독자로 내려와 친척 중에서는 제일 가까운 친척이었네 . 아버지의 후광도 있었지만 , 아저씨의 지원으 로 6 개월의 대학입시 준비 , 4 년간의 대학 학부 생활 , 4 년간 대학원과 연구생 생활 , 총 8 년 6 개월간의 일본 생활을 별 어려 움 없이 마치고 , 1958 년 3 월 인하공과대학 교수 ( 전임강사 ) 가 되어 귀국했네 . 1954 년 4 월 13 일 , 내가 그해 3 월 와세다대학 ( 早稻田大學 ) 을 졸업하자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함양 ( 咸陽 ) 출신 대학생과 대학졸업생을 집으로 초청하여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네 . 71 년이 된 그때의 사진이 있지 . 앞줄 왼쪽부터 최상 , 필자 , 아주머니 , 아저씨 , 양부기 ( 양건 ), 하덕성 전무 ( 일본 유카타를 입은 분 ), 뒷줄에는 한사람 건너 우경자 , 오경자 , 오경란 , 오능 자 그리고 다는 이름이 기억되지 않지만 , 박남석 , 정영상 , 박호성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네 . 아저씨가 안고 있는 꼬마는 아저 씨 친형님 ( 오병호 ) 의 손자인 것 같네 . 한 사람 한 사람 설명할 수는 없지만 , 최상 형은 동경대학 수산학과의 대학원생으로 후일 박사학위를 받고 KIST 의 책 임연구원이 되었네 . 앞날이 촉망되었는데 , 불행하게도 일찍 타계하여 안타깝네 . 나하고는 아저씨 댁에서 수개월을 한방에 서 지냈지 . 우경자 여사는 최상 박사의 부인이네 . 정영상 군은 게이오대학 ( 慶應大學 ) 졸업반 학생으로 나하고는 각별한 사 이상희 어머님 정강(鄭崗) 여사가 필사한 한글 소설주암칼럼 105 자원리싸이클링 제 34 권 제 4 호 , 2025 이였네 . 여기에 모인 함양 출신 회원 중 적지 않은 회원이 아저씨가 기증한 장학금을 받았네 . 아저씨는 이렇게 육영사업도 하셨지 . 내가 이렇게 구구하게 말을 늘어놓는 것은 이 집이 자네의 처가가 되었기 때문이네 . 사진 뒷줄 세 번째의 오경자는 아저 씨 장녀이고 , 당시 고 3 인데 후일 자네와 결혼하지 않았는가 . 아저씨의 세 자매는 나하고 친동생 , 친오빠 같이 지냈고 , 필자 와 아주머니 사이에 보이는 아들 후미오 ( 文雄 ) 군은 , 나하고 친형제같이 그때도 지금도 지내고 있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 지 . ◎ 6.25 사변 후 이제 자네의 이야기를 할 차례인 것 같네 . 마산 ( 馬山 ) 요양소에서 보낸 자네의 편지를 1951 년 동경에서 받았지 . 마산요 양소에 입소한 경위는 아주 간략하게 적고 , 일본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네 . 일본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내가 놀랄 만 큼 다양하였네 . 병실에서 수종의 일본 잡지를 읽고 있었고 , 일본 방송도 열심히 듣고 있었던 것 같았네 . 한마디로 말해서 자네가 일본 생활을 선망하고 있음을 느꼈네 . 후일 동경대학에서의 연구생 생활 , 일본말로 쓴 많은 논문 , 1986 년 ‘ 현대일 본학회 ’ 회장 역임 등이 우연이 아닌 것 같더군 . 그런데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네가 천애의 고아가 되고 , 말 로 할 수 없는 역경을 넘어 당당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말하고 싶네 . 1949 년 12 월 사랑하는 어머님이 세상을 뜨자 자네는 그 충격으로 또 집 정리로 입학한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를 거의 다니지 못했다고 했네 .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학교에 다니려고 할 때 6.25 사변이 터져 피난을 가야 했었네 . 포 성의 틈바구니에서 서울을 빠져나가 남도 천리 길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 마산까지 간 것을 생각하면서 , 또 그때의 비참 한 자네 심정을 추상하면서 동경에서 많은 밤을 지새웠지 .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 피난 가는 길에 함양 휴천면 지리산 기슭 에 살고 있는 급우 김종철 군을 찾아갔지 . 종철이가 개를 잡아 만신창이가 된 자네 몸을 보신케 하고 수일을 쉬게 하였네 . 자네하고 종철이는 친한 사이였지만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자네가 오죽했으면 산간벽지의 종철이를 찾아갔을까 , 또 종철이의 가슴 뜨거운 배려와 성의 , 이 이야기는 몇 번을 들어도 그 감동과 신선함이 삭을 줄을 모른다네 . 나는 1950 년 4 월에 와세다대학 ( 早稻田大學 ) 이공학부에 입학하였네 . 3 개월 후 6.25 사변이 터져 착잡하고 비통한 심 정으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네 . 그런 와중에 집에서 날벼락 같은 슬픈 소식을 연이어 세 번이나 받았네 . 둘째 형님 ( 在 1954년 4월 13일 동경 아저씨 댁에서 함양 학우 졸업생 축하회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4, No. 4, 2025106 華 ) 이 가족을 모두 데리고 월북했다는 거야 . 이 사건으로 우리 집은 월북자 가족이 되고 , 당국의 요시찰인이 되었네 . 자네 만 알고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 했지만 , 후일 나는 보안사에 연행되는 등 오랜 세월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한 생활을 해야 했네 . 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연이어 큰 형수 씨가 돌아가셨다는 편지를 받았네 . 할머니는 연세가 있으시니까 그렇다고 치고 , 40 대 후반의 큰 형수 씨 죽음은 큰 충격이었네 . ‘ 믿기 어려워 ’ 라는 서툰 시를 지어 애절한 내 마음을 겨우 달랬다네 . ( 큰 형 수 씨 의 주 검 을 아 끼 어 ) 확 실 히 움 직 이 고 있 는 그 의 모 습 이 너 무 도 처 연 하 게 보 이 는 나 에 게 그 의 주 검 을 믿 으 려 고 요 모 진 바 람 이 잠 이 들 고 모 두 가 악 몽 에 서 깨 어 날 때 산 산 이 헤 어 진 형 제 가 다 시 모 이 어 울 분 과 서 러 움 을 나 누 기 도 전 에 인 생 사 십 이 면 아 직 청 춘 이 거 늘 이 국 하 늘 아 래 날 아 온 한 조 각 종 이 가 그 의 주 검 을 믿 으 려 고 요 층 층 이 자 라 나 는 어 린 오 남 매 모 성 애 도 의 식 못 하 는 영 아 원 아 가 북 없 이 어 떻 게 살 려 고 이 꿈 같 은 이 야 기 를 믿 으 려 고 요 박 명 하 신 어 머 님 의 임 종 이 아 직 내 뇌 리 에 심 각 히 그 려 져 원 한 과 동 정 이 갈 등 할 때 오 늘 다 시 그 뒤 를 따 른 다 니 형 님 의 아 버 님 의 심 정 도 모 르 고 황 혼 만 찾 아 들 면 제 흡 하 는 아 이 들 아 ! 어 떻 게 눈 을 감 았 으 리 아 마 도 어 리 석 은 나 의 착 각 이 겠 지 一 九 五 三 四 月 오 재 현 지 음 ◎ 서울에서 재회 내가 1958 년 봄에 귀국했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지 . 귀국하자 바로 서울 정동의 자네 사무실을 찾아갔네 . 9 년 만의 재회였지 . 기억이 좀 희미하지만 이름이 ‘ 방송문화연구실 ’ 같았어 . 정부 방송국 ( 라디오 ) 산하 기관으로 한운사 ( 韓雲史 ) 씨 가 실장이었어 . 그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이 연구실에 근무하고 있는 자네를 만난 거야 . 그림공부에서 사회 학으로 어떻게 방향이 바뀌었는가 끝끝내 물어보지 못했지만 , 자네 필생의 연구목표인 매스커뮤니케이션 (mass communication) 공부가 이때부터 시작한 것 같네 . 자네 주선으로 내가 이 연구실의 일본어 모니터가 되어 수개월 동안 이 연구실을 자주 드나든 기억이 나네 . 돈암동의 자네 하숙집도 몇 번인가 놀러 갔지 . 옛날의 깔끔한 성품이 그대로 남아 있 고 , 당당하고 늠름한 자네 모습이 믿음직했어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 1959 년 세이죠 대학 ( 成城大學 ) 영문과를 졸업한 아저씨의 장녀 오경자 양이 서울에 와 이화여 자대학교 대학원 영문과에 입학한 거야 . 당연히 내가 후견인이 되고 우리 셋이 자연스럽게 자주 만났지 . 이렇게 1 년이 지 났을까 . 경자의 반듯한 성격과 아름다운 교양미에 자네 마음이 움직이고 , 그리고 경자도 자네가 싫지 않아서 나 없이 둘이 서도 만났지 . 이 만남이 발전하여 둘이 연애하게 되고 , 드디어 결혼하게 되었지 . 결혼식에서 일본 아주머니 ( 자네 장모 ) 가 남모르게 손수건으로 눈물을 계속 훔치고 있는 것을 곁에서 나는 보았네 . 두고 보십시오 . 잘 살고 좋은 사위가 될 것입니 다 , 하고 아주머니 마음을 달랬네 . 고도 ( 孤島 ) 에 딸을 던져둔 것과 같은 아주머니의 심정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 먼 훗날 사 윗감을 잘 구해주었다고 아주머니로부터 은근히 칭찬을 받았지만 , 그때는 아니었다네 . (2025. 7. 7. 기 )주암칼럼 107 자원리싸이클링 제 34 권 제 4 호 , 2025 내 친구 이상희(李相禧)(2) 연세대학교 오재현 명예교수 ◎ 동경 생활 서울에서 신혼생활 1 년 후 자네 부부는 1962 년 동경을 향하여 훌쩍 떠났어 . 일본에 대하여 호기심도 많았고 , 암암리에 일본 생 활을 선망하였는데 , 드디어 기회가 온 거지 . 처가가 재력가이니까 자네 부부가 얹혀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 처가살이가 불편 한 점이 전연 없을 수 있겠는가 . 자존심이 강 한 자네인지라 자네의 심정이 평온한 날만은 아니었을 거야 . 그래도 내가 볼 때 자네의 동 경 생활은 대박이었어 . 자네는 폐 ( 肺 ) 가 약해 늘 신경이 쓰였지 . 형님도 누님도 폐로 고생하시다가 아주 젊어 서 돌아가셨어 . 그래서 더욱 부담을 느끼고 살아온 거야 . 동경대학 부속 병원인지 기요세 ( 淸瀨 ) 병원이지 확실치 않지만 동경의 유명 전문병원에서 수술하고 완전히 치유되었어 . 자네 부인의 심적 , 물리적 고생이야 말 할 수 없었겠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 두 번째는 자네가 동경대학 대학원의 연구생이 되어 2 년 동안 마음껏 수준 높은 공부를 한 것이야 . 어떤 연구를 했는 가는 나야 알 길이 없고 , 사회학 또는 언론학으로 추정되지만 , 이 분야의 일본 학자 및 연구자와 유대를 갖게 된 것이 눈 에 안 보이는 큰 소득으로 아네 . 자네가 일본말로 논문을 써 일본 학회지에 많은 논문을 발표한 것도 이때의 연고라고 할 수 있지 . 세 번째는 1963 년 10 월 말 자네 아들 ( 志遠 ) 이 탄생한 거야 . 우리 아들 정탁이 보다 딱 1 주일 먼저였어 . 자손이 귀한 자네 집인지라 얼마나 기뻤겠는가 . 지난 2025 년 3 월 31 일 , 지원이가 그의 아들 주현 ( 周炫 , 자네 손자 ) 이를 데리고 이곳 삼성노 블카운티에 왔어 . 그래서 가까운 ‘ 삼부자 갈비집 ’ 에서 셋이 저녁을 먹었지 . 주현이는 강원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철도공사에 근무하고 있네 . 자네하고는 달리 주현이가 반주로 맥주 3 병을 거뜬히 비웠어 . 씩씩하고 늠름하였어 . 세상 에 내가 자네 손자하고 술을 마시다니 .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 천당에서 자네 부부가 빙그레 웃겠지 . 이러니 동경 생활 3 년이 대박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 이 시기 중학교 교사인 김종철 군이 문교부 파견으로 경도 한국학교에 근무하고 있었지 . 먼 거리였지만 자네하고 가끔 만나서 정종 완고뿌 ( 한 컵 ) 를 즐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 ◎ 불광동 시절 자네가 만 3 년의 동경 생활을 마무리하고 1965 년 귀국하였네 . 그리고 좀 늦게 귀국한 자네 가족과 같이 불광동 연신내 에 보금자리를 잡았지 . 인하공대를 사직하고 금속 ‧ 연료종합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나도 자네를 따라 불광동 연신내로 이사 를 했네 . 그래서 가족끼리 진관사계곡에 가고 , 만리포 해수욕장도 갔지 . 당시는 영동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이라 서해가 해 수욕장으로 인기였지 . 한편 우리 둘은 북한산 등산은 말할 것도 없고 지리산 등반도 두 번 한 것으로 알고 있네 . 첫 번째 지 리산 등산기의 간추린 단편을 여기 옮겨 볼까 하네 . 삼부자 갈비집에서(2025.3.31.) 왼쪽부터 이지원 교수, 이주현 군, 필자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