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인문학 산책 78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수레를 파괴할 때도 프리기아인들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양은 그렇지 않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서슬 푸른 승상이었고 그 앞에서 칼부림을 한다는 건 가당찮은 일이었다. 고환이 양을 배제하고 징에게 승상자리를 물려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풀 수 없는 매듭은 없다. 누구도 풀 수 없다는 고르디우스의 자신감은 어 디서 비롯되었을까. 아니 풀 수 없는 매듭이 있을 까. 단언하건데 풀 수 없는 매듭은 없다. 아무리 복 잡하게 엮는다고 해도 매듭을 푸는 원리는 단순하 다. 끝을 잡고 묶은 것의 역순으로 빼 나가면 결국 매듭은 풀리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모든 끈은 끝 이 있고 매듭을 푸는 열쇠는 그 끝에 있는 것이다. 풀 수 없는 매듭, 이를테면 끝과 시작점을 이어 붙 이면 어떨까. 그것은 매듭 풀기 문제라 할 수 없다. 엮인 폐곡선을 푸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고 답이 없는 문제를 내는 건 속임수에 불과하니 말이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수없이 얽어 복잡성을 더한 뒤에 매듭 끝을 잘 숨겨두는 것뿐이다. 하지만 고르디 우스는 매듭 끝을 감추지 않았다. 신전 기둥에 못으로 박아놓기는 했어도 실마리를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해놓은 것이 다. 그러니 아무리 복잡하게 매듭을 얽어놓았다고 해도 끈기만 있다면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결국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알렉산드로스와 고양을 칭찬할 수 없는 이유는 그래서다. 무지를 안다는 것 물음은 때로 수수께끼나 현묘한 꿈 또는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침에는 넷 낮에는 둘 저녁 에는 세 개의 다리로 걷는 짐승은 무엇인가. 일곱 모가 난 바위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찾아라. 그 아래 숨겨진 칼을 가져 오면 왕자가 될 것이다. 야윈 소 일곱 마리가 살진 소 일곱 마리를 잡아먹는 꿈은 무슨 뜻인가.5) 이해할 수 없는 것, 눈 에 보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하고 상대적으로 한계가 없는 신을 생각해 낸 것은 자연 스런 진보의 과정으로 보인다. 물음이나 수수께끼는 인간과 신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도구였다. 인간은 조금 알고 많이 모른다.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묻고 되묻고 밤을 지새우며 생각한다. 현자를 찾아 먼 5) 첫째 질문은 오이디푸스가 풀었다는 스핑크스의 질문, 두 번째는 유리왕 설화에 나오는 아버지의 수수께끼, 세 번째는 요 셉이 해몽한 이집트 파라오의 꿈을 말한다.고르디우스의 매듭과 쾌도난마 Vol. 26, No. 4 79 길을 떠나고 신탁을 구하기 위해 신전 아래 무릎을 꿇는다. 동안거에 들어 화두에 매달리거나 신성한 삼나무숲을 헤맨다. 알고 싶은 욕망, 인류를 여기 까지 이끌어온 건 바로 물음이었다. 조금 아는 것 보다 많이 모른다는 것, 그 무지의 자각이 바로 진 보의 동인이었던 것. 내가 아는 것은 모른다는 사실뿐이라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한 이가 있었다. 우리가 그를 최고 의 현자로 여기는 이유,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가 얼마나 거대한 무지로 둘러싸여 있 는지 그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지를 자각하므로서 인간은 스스로 물음을 만들고 새로운 물음을 찾아 길을 나섰으며 물음으로 세상을 이해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나 고환의 얽힌 실타래 역시 문 제를 통해 지혜를 구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공학자가 일하는 법 알렉산드로스와 고양의 일화를 보며 수많은 문 제 앞에서 골몰하고 있을 지반공학자들을 생각한 다. 탄성체를 다루는 다른 분야와는 달리 흙이라는 소성체를 다루는 우리는 문제와 답 사이에서 끝없 는 갈등을 경험한다. 다양한 조사와 실험을 통해 파라미터를 구하고 정밀도가 높은 해석프로그램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탄성체처럼 똑뚝 떨어지는 답은 꿈도 꾸기 어렵다. 어렵게 구한 결과 앞에서 우리는 다시 오차 범위와 신뢰 수준을 검토하기 위 해 밤을 지새워야 한다. 소성체는 우리가 알고 싶 은 값이 어느 범위에 있다는 개략적인 사실만 알려 주기 때문이다. 단지 기술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다. 도시 문명을 떠받치는 공학자는 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사투를 벌여야 한다. 재료와 시간의 한계는 물론이고 관습이나 제도 법규의 제약, 프로젝트를 둘러싼 이견 민원 다툼 등 수많은 문제가 공학 자의 손을 기다린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문제도 한둘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공학자들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인문학 산책 80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을 자르듯이 칼을 휘두르면 어떻게 될까. 고양처럼 얽힌 실타래 앞에서 쾌도난마의 유혹에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 칼로 매듭 자르기,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제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철도나 도로처럼 인간의 편익을 위한 프로젝트든 산사태나 토석류 같은 자연재해를 막기 위한 것이든 공학자들이 문제를 포기하는 순간 지금까지 인간이 누 려온 안락한 삶은 즉시 멈추게 될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가 어떤 것이든, 해결의 실마리가 얼마나 깊이 감추어져 있든 쾌도난마의 유혹에서 벗어나 묵묵히 고민하고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공학자가 마주한 얽힌 실타래 의 숙명 때문일 것이다. 끝.<제3편>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since1933 Vol. 26, No. 4 81 <그림 1>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since1933』 내부 광장, 2024년 (ⓒ필자 촬영) 2022년 10월 23일, 필자가 이곳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을 처음 방문한 날짜이다. 2024년 10월 23일, 우연히 그러 나 필연처럼 2년 후 같은 날짜에 여기를 찾아가게 되었다. 2년 전, 본 장소에 대한 인상이 깊었기에 다음번에는 아이들 을 모두 데리고 다시 방문해야겠다 생각하던 차였는데, 1년 365일 가운데 똑같은 달과 날에 (같은 장소를) 찾아가게 되 <제3편>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since1933 문지영 <공학박사+조경학석사+예술학학사+외국어고>, 現 글쓰고 그림그리는 작가, 대한토목학회 출판도서위원회 위원장, 한국여성디자이너협회 이사문화예술 산책 82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었다니, 사진을 정리하던 중에 알게 되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날도 그 이전 날 에도 날씨가 참 좋았다. 기온은 적당히 차가웠고 실내와 실외 전시 공간을 들락날 락하며 체온을 조절할 수 있었다. 서두가 길어졌군. 오늘의 소개 장소는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since1933』 (그 림 1)이다. 입구 외벽에는 그림 2와 같이 장소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친절 하게도 크게 서 있다. 과거에 그 어디에선가 사용되었을 거대한 철판은 붉게 부식 되었다. 붉은 벽 위에 희고 큼직하게 붙인 글자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미술작품과 도 같은 표지판을 통해 여기가 예사롭지 않은 공간임을 알려준다. 초입부터 방문객 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하다. ‘방직공장(紡織工場)’이 무엇인지 아는 독자분은 연배가 어느 정도 되실 것이다.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단어이기 때문이다. ‘방직(紡織)’의 사전적인 의미는 ‘식물 ․ 동물 ․ 광물질에서 실을 자아내고 그 실을 가지고 피륙을 짜는 제조업’, 일명 ‘실잣기’이다. 유의어로는 ‘길쌈, 방적(紡績)’이 있다. 쉽게 말하면 ‘기계를 이용해서 실을 뽑아 피륙을 짜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방직공장(紡織工場)’은 ‘실을 뽑아서 천을 짜는, 직물(織物)을 직조(織造)하는 공장(工場)’을 일컫는다. 이해를 위해 아래 의 참고 사진(그림 3, 그림 4)을 수록한다. <그림 3> 과거 조양방직에서의 실잣기 기록사진1 (출처: https://www.ibtravel.co.kr) <그림 4> 과거 조양방직에서의 실잣기 기록사진2 (출처: https://www.ibtravel.co.kr) ‘신문리미술관’으로 재탄생한 ‘조양방직’은 과거 외딴섬 강화도에 전기와 전화 시설을 들여오게 한 핵심 역할을 했 다. 따라서 지역의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장소이자 존재이다. 조양방직의 설립 이후로 크고 작은 직물 공장들이 <그림 2> 『조양방직: 신문리 미술관 since1933』 입구, 2022년 (ⓒ필자 촬영)<제3편>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since1933 Vol. 26, No. 4 83 강화도에 우후죽순(雨後竹筍) 약 60개 이상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강화도를 먹여 살리는 직종으로까지 성장하게 되었 음은 과거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한때 잘나가던 조양방직은 한국전쟁1) 이후로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1958년에 문을 닫게 되었고, 이후에 단무지 공장과 젓갈 공장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오랫동안 문을 닫고 방치되었다. 인터넷사이트 나무위키에서는 조양방직에 대한 설명을 아래와 같이 적어 놓았다. 필자가 약간의 문구 수정과 잘못 표기된 단어를 정 정했음을 미리 밝힌다. 조양방직은 1937년 홍재묵, 홍재용 형제가 설립한 방직공장이다. 설립 당시 125,000원(현시가 60억 원 내외)의 자본금으로 시작했으며 700여 평의 2층 건물과 50여 대의 직조기를 갖추고 인견과 마직물 염색을 주로 했다. 그 러나 설립 이후 착공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공장 가동 후 1년여가 되는 1939년에 큰 화재로 소 실되고 말았고 피해액은 40만원(200억원 내외)에 달했다고 한다. 설립 초기에 사장은 형 홍재묵이 맡았고 일본 에서 대학을 나온 동생 홍재용이 부사장을 맡아 운영했다. 하지만 1942년 미쓰비시 산업에서 일하던 이세현에게 공장을 매각했고, 이세현은 아들 이현일과 함께 조양방직을 운영하다가 한국전쟁을 거쳐 1958년에 폐업한다. 이 후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2013년 문화방송 주말 드라마 ‘백년의 유산’의 촬영지로 사용되면서 널리 알려졌고,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 미술관 카페가 들어서게 된다. 2020년대인 지금은 많은 인파가 찾아온다. <그림 5>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since1933』 입구, 2022년 (ⓒ필자 촬영) <그림 6> 도시재생 우수사례지 선정 플랭카드, 2022년 (ⓒ필자 촬영) 방직공장의 변신, 리뉴얼. 문화와 예술의 씨실과 날실로 새 옷을 해 입은 조양방직은 폐공장, 폐허가 된 죽은 공간 에 심폐소생술을 하여 극적으로 살린 장소이다. 나아가 도시․ 건축물 재생을 성공리에 보여준 사례(事例)이기도 하다 (그림 6). 1) 한국전쟁(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만 3년 1개월 2 일간 계속되었다.문화예술 산책 84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조양방직은 카페인가? 박물관인가? 미술관인가? 우선 이곳은 ‘신문리미술관’ 이름에서와 같이 미술관이다. 필자는 이곳을 ‘공공미술관(公共美術館)’이라고 부르고 싶다. 물론 이곳은 사유 공간이다. 그러나 공공의, 다수를 위한, 소시민 을 위한, 대중적인, 고가의 입장료를 내고 한정된 공간에서 극소수만이 예술품을 감상하는 다소 폐쇄적인 미술관이 아 닌, 누구에게나 열린 미술관이라는 의미로 보면 ‘공공’에 가깝다. 골동품(骨董品)2)과 과거의 발명품들이 가득한 만물상 (萬物商)3), 일상 생활용품 박물관(日常 生活用品 博物館)으로 새롭게 변신한 조양방직의 이모저모를 필자와 함께 구경 해 보자. <그림 7>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since1933』 내부 광장을 내려다보는 망원경, 2024년 (ⓒ필자 촬영) <그림 8>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since1933』 입구, 2024년 (ⓒ필자 촬영) <그림 9, 10> 볼거리가 가득한 야외 전시장, 2022년 & 2024년 (ⓒ필자 촬영) 2) 골동품(骨董品)이란? ①오래되고 희귀한 세간이나 미술품, 골동. ②오래되었을 뿐이고 가치도 쓸모도 없게 된 물건이나 사 람의 비유이다. (출처: 민중에센스 국어사전) 3) 만물상(萬物商)이란? 일상생활에 필요한 온갖 물건을 파는 가게이다. (출처: 민중에센스 국어사전)<제3편>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since1933 Vol. 26, No. 4 85 <그림 11~14> 볼거리가 가득한 야외 전시장, 2022년 & 2024년 (ⓒ필자 촬영) 조양방직을 소개한 간판 글 내용(그림 15)은 아래와 같다. 일본 주택 건축양식에 한옥의 미를 가미한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공장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강화 갑부 였던 홍재묵 ․ 재용 형제가 1933년 최초의 민족 자본으로 설립하였는데 이는 1936년 서울의 경성방직보다 3년이 빠르다. 조양방직은 1960년대 까지 우리나라 최고 품질의 인조 직물을 생산했고 강화가 섬유산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곳이다. 2013년 TV 드라마 ‘백년의 유산’에 서 조양방직 사무실이 옛날 국수집으로 나오며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조양방직의 실외(야외)와 실내(건물 내부) 모든 공간에서 과거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 했다. 미 술품을 포함한 각종 전시 물품은 직접 만져보고 사용도 해보는 체험이 가능한데, 방문객들은 추억이 깃든 물품들을 하 나씩 쓰다듬어 가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더라. 지게와 물동이를 직접 지고 메고 이동해 보기, 악기 연주하기, 게임기 만 져보기 등이 허용된다. 필자의 아이들은 신이 나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물론 유리 찻장 안에 얌전히 진열된 골동품들도 적지 않게 있다. 벽에, 바닥에, 테이블 위에, 심지어는 건물 꼭대기에, 실내 공간에서는 천장에 각종 골동품이 걸리고 <그림 15> 조양방직 내 소개 간판문화예술 산책 86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놓이고 매달려 있으니, 본인을 중심으로 360도 모두 구경거리라고 생각해도 된다. 실외와 실내 두 공간 모두가 전시장 이며, 실내․ 외를 연결하는 통로 공간, 건물과 건물 사이의 포켓 공간까지 야무지게 전시해 놓았으니 꼼꼼히 챙겨보면 재미가 더할 것이다. 일상의 물건들이 무신경하게 여기저기 툭툭 놓여있어서 가서 슬쩍 건드려 보기에도 좋다. 구경거 리가 자연스럽게 사방으로 널려 있으나 자세히 보면 세심하게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위치시킨 흔적도 엿보이니, 고수 (高手)의 경지 같기도? <그림 16> 볼거리와 체험 거리가 가득한 실내 전시장, 2024년 (ⓒ필자 촬영) 실외의 과거 옛 적산가옥(敵産家屋)4), 공장 건물, 창고, 심지어는 재래식(일명 푸세식) 화장실까지 전시 중이다. 대 형버스 및 각종 차량, 전화부스, 대형 소파와 테이블, 이발소의자 ․ 치과의자 등의 다양한 의자들, 창문과 창틀, 작은 소 품, 손안의 장신구까지 전시품의 크기도 다양하다. 각양각색(各樣各色)의 평면, 입체 미술품은 물론이거니와 생활용품, 농기구, 각종 전신 ․ 전화기, 기계, 문구류 등 손에 잡힌 옛것은 모조리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만 같다. 특정 골동품은 과 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기도 하고. 이곳에 있는 추억팔이 물품들은 이용철씨가 20여 년간 중국과 유럽 등지에서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찾은 골동품이라고 한다. 추억이 가득 담긴 사진, 포스터, 그림, 광고지, 엘피(LP)판, 각종 물품이 과거의 사람들과 오늘날의 사람들을 이어주고 있는 ‘감성공간’이다. 타임머신을 타지 않아도,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다. 오늘날이라는 시간 속에 옛 추억의 꼭지들이 자리를 잡았다. 4) 적산가옥(敵産家屋)은 패망한 일인 소유의 재산 중 주택을 지칭한다.<제3편>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since1933 Vol. 26, No. 4 87 <그림 17> 볼거리와 체험 거리가 가득한 실내 전시장, 2024년 (ⓒ필자 촬영) 외부에서의 구경을 어느 정도 마쳤으면 슬슬 실내로 들어가서 쉬고 싶어진 다. ‘주문 하는 곳’ 흰색 푯말 위 검은 글씨와 빨간색 화살표가 반갑게 보인다(그 림 18). 그러나 방심은 금물! 주문 후 앉아서 먹을 장소로 찾아 들어가다 보면 어 마어마한 규모의 또 다른 볼거리에 놀람을 금치 못하게 되니, 여기부터 다시 구 경이 시작된다고 봐도 된다(그림 19, 20). 참고로 이곳에서는 입장료를 따로 내 지 않아도 된다. 내부에서 판매하는 빵과 케이크, 음료가 입장료를 대신한다고 봐도 좋고. 외부에서 가지고 온 음식은 내부에서 먹을 수 없으니 참고하시라.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 기본정보 ∙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589-23 (인천 강화읍 향나무길 5번길 12) ∙ 영업시간: 월~금요일 오전11시~저녁8시 토, 일요일 오전11시~저녁10시 ∙ 전화: 032-933-2192 <그림 18> 음식을 주문하러 실내 전시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 2022년 (ⓒ필자 촬영)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