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ITA WTC 참관기 118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Vol. 26, No. 2 119 고대의 터널, 어떻게 만들었을까(1) 조악한 손도구밖에 없던 시절 어떻게 단단한 바위를 뚫었을까. 달리 살펴볼만한 수단은 떠오르 지 않는다. 그저 협소한 막장에서 몇 명이 교대로 들어가 조금씩 바위를 쪼아나갔을 것이다. 그 들이 가진 건 망치와 정 그리고 시간뿐이었다. 히스키아 수로터널(예루살렘) 근대 이전 땅속에 길을 만드는 것은 아주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돌을 쌓아 다리를 놓거나 건축물을 짓는 것은 노 예노동을 통해 얼마든지 규모를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터널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좁은 막장에서 일일이 바위를 쪼아내는 작업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땅속에 만들어지는 터널은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 고대의 터널, 어떻게 만들었을까(1) 김재성 (주)동명기술공단 부사장인문학 산책 120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지상에 만들어지는 다리나 건축물이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는 것과는 달리 터널은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 그 럼에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고대의 터널이 많지 않은 건 땅을 파내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특별한 일이었음을 역 설적으로 말해준다. 터널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고대에 만들어진 터널은 그것을 만드는 방법과 목적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땅을 파낸 후 돌 을 쌓으면서 터널을 만드는 방식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다. 기원전 26세기에 만들어 진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외부에서 보이는 규모도 거대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안에 만들어진 지하공간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터널이다. 피라미드 중심에 있는 왕과 왕비의 방을 비롯하여 수많은 지하 방과 이를 연결하는 터널과 회랑이 만들어졌다. 최근 들어 탄성파나 CCTV 등 조사기법을 통해 드러난 터널 형태와 규모는 그 정교함에 혀를 내 두를 정도다. 이런 방법은 피라미드 외에도 유프라테스강의 강밑터널이나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었다고 하는 미노스왕 의 지하궁전 등 고대의 시설물에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지하를 파 들어가는 방법이다. 인간이 터널을 만들 때 가장 먼저 생각해 낸 방법이 아닐까 싶 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거주했다는 터키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규모와 정교함에 있어서 놀라운 터널굴착 기술을 보여준다. 이러한 터널 구축이 가능했던 것은 석회암의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지역의 석회암 지반은 파 내기는 비교적 쉽지만 이후 수화반응을 통해 점점 단단해져 간다. 이렇게 직접 파낸 고대의 터널은 그렇게 많지는 않 다. 가장 길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동지역의 수로터널 카나트(Qanat), 정밀한 측량으로 유명한 사모스 섬의 에 우팔리노스 터널, 로마의 플루로(Fu rlo) 터널, 우리나라 무주의 나제통문 등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할 슈타트 소금동굴, 함경도의 갑산광산(甲 山鑛山) 등 소금이나 보석 철 구리 등 광물을 얻기 위해서 뚫은 터널까지 포함하 면 이런 형식의 터널도 적지 않을 듯하다. 데린쿠유 지하도시와 내부Vol. 26, No. 2 121 고대의 터널, 어떻게 만들었을까(1) 세 번째는 기존에 있던 지하공간이나 공동을 확장하여 만든 터널일 것이다. 앗시리아 침략에 대비해 유대인이 뚫었 다는 히스키아 터널은 성밖에 있는 샘물을 성안까지 끌어오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500여 미터로 긴 터널이긴 하지만 터널 형태를 보면 원래의 자연동굴을 확장한 구간과 인위적으로 뚫은 구간이 혼재한다.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람 이 살고 있는 베트남 선둥동굴(Sondonng)은 곳곳에서 인위적으로 주거공간이나 통로를 넓힌 흔적이 발견된다. 그리스 의 소피아 동굴, 슬로베니아의 포스토이나 동굴 등 인간에 의한 자연동굴 확장 사례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강밑에 길을 만들다 유프라테스 강에 다리를 놓고 그 밑에 터널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디오도루스의 세계사(Bib liotheca historica) 나 헤르도 토스의 역사(H istoriai) 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디오도루스나 헤르도토스의 기록도 터널이 있던 도시가 사라지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이들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1). 여러 정황을 따져 보면 터널을 지은 것은 유프라 테스 강변에 화려한 공중정원을 만든 바빌로니아의 삼시 아다드 5세2)와 그의 왕비 세미라미스가 아닐까 싶다. 삼시 아다드 5세는 당시 님루드였던 수도를 바빌론으로 옮기고 유프라테스 강 양안에 왕궁과 성곽을 건설하였다. 이때 만 들어진 공중정원3)은 세계의 불가사의로 불릴 만큼 거대했는데 왕궁과 성곽을 연결하는 교량을 지으면 서 터널도 함께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물은 사라지고 없지만 헤르도토스의 기록에는 다리와 터널의 규모가 자세히 나와 있다. 다리는 기 둥을 3.6미터 간격으로 세우고 그 위에 널을 놓아 만들었으며 폭은 9미터에 이른다. 두 대의 마차가 빗겨갈 수 있는 폭이다. 기둥은 물론 석재였겠지만 상판은 다리규모로 볼 때 목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터널은 강바닥을 파내고 구운 벽돌을 쌓아 만들었으 며 벽돌 틈에는 물이 세지 않도록 역청을 칠했다4). 다리 전체 길이는 900미터였지만 그 밑에 터널은 접근경사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훨씬 길었을 것이다. 1) 건설시기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신바빌로니아, BC625~539년), 세미라미스 시대(아시리아, BC2160년경), 함무라비 시대 (바빌로니아,BC1776~1768년경) 등 이설이 있다. 2) 삼시 아다드 5세. BC823~810년까지 바빌로니아 통치 3) 세미라미스 시대에 만들기 시작하여 네부카드네자르2세 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4) 천연아스팔트나 역청은 고대 매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흔하게 사용하던 재료였다. 매소포타미아인문학 산책 122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터널의 규모는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5). 작업은 흙댐쌓기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방법은 지금도 흔히 쓰인다. 먼저 터널이 놓일 구간 주변을 흙으로 쌓아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그 다음 안쪽의 흙을 파내고 바닥을 다진 뒤 터널과 다리기초를 놓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흙을 채워 터널을 묻고 다리를 놓으면 된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와 터널은 물론 화려했던 바빌로니아의 유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신바빌로니아는 기원전 539 년 페르시아에 멸망하였으며 기원전 486년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해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화려했던 유적이 대부분 모래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바빌론의 페허는 지금도 사막속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동안 이라크는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바빌론 고대 성곽과 공중정원이 있던 ‘왕의 언덕6)’을 복원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이란과 미국 등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복원은커녕 남아 있던 유적까지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랜 세월 인류에게 아름다 운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도시의 유적 과 왕비의 사랑 이야기가 깃든 공중정 원을 다시 보게될 수 있을까. 어쩌면 복 원 과정에서 강밑터널이 발견될 지도 모른다. 땅속의 터널은 입구가 사라지 면 금방 뇌리에서 사라지지만 어지간해 서는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지는 않겠지만 부분적인 흔적이라도 찾게 되면 인류 최초의 강 밑터널은 물론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유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최초의 터널 바위를 뚫어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게 한 최초의 터널은 무엇일까. 기원전 687년 완성된 그리스 사모스 섬의 에우 팔리노스(Eupalinos) 터널이다7). 본래 목적은 수로를 위해서 만들었지만 바닥을 나누어 한 쪽으로는 물길을 한 쪽으로 는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히스키아 수로터널의 최소단면이 0.7평방미터인데 비해 에 우팔리노스 터널의 단면은 3.7평방미터나 된다. 처음부터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계획했음이 분명하다. 터널이 있는 암페로스산은 225미터로 나지막하지만 암질이 단단하다. 터널을 뚫은 이유는 산허리쯤에 있던 아이아테스 샘물을 반 대쪽 해안에 있던 도시까지 끌어오기 위해서였다8). 샘 근처에는 케르케테우스 산9)을 포함한 수목지대가 넓게 분포되 5) 터널의 전체 길이는 교량보다 훨씬 길었을 것이다. 터널 높이는 3.7m 폭은 4.6m로 기록되어 있다. 6) 왕의 언덕(Tel-Amuran-ibn-Ali). 이라크 바그다드 남부 바빌론 유적지대에 있는 지역. 7) 에우팔리노스터널. 공사기간은 BC.672~687년이다. 1036m를 뚫는데 15년이 걸렸다는 것은 하루 20cm 정도를 파냈다. 복원중인 왕의 언덕(이라크)Vol. 26, No. 2 123 고대의 터널, 어떻게 만들었을까(1) 어있어 늘 풍부한 물이 넘쳐흘렀다. 헤르도토스는 이 터널을 보고 깊이 감명을 받은 듯하다. 그의 저서에는 이렇게 기 록되어 있다. 사모스인의 가장 큰 업적은 물길을 내기 위해서 암페로스산에 뚫은 터널이다. 이 터널은 길이가 7스타디 온, 폭과 높이가 각각 8푸스에 이른다. 터널 바닥에는 깊이 20페키스 폭 3푸스의 도랑을 파서 물이 흐르도 록 했는데 이 물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풍족하게 물을 쓸 수 있다10). 헤르도토스. 역사 3권 샘에서 터널 입구까지 그리고 터널에서 도시까지는 정교하게 도랑을 파고 석회로 물이 세지 않도록 처리하였다11). 암페로스산을 관통한 터널 길이는 1036미터다. 터널 폭과 높이는 위치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1.8미터 내외다. 바 닥에는 폭과 깊이가 0.7미터 가량 되는 수로를 팠다. 수로 깊이는 위치별로 조금씩 다른데 이는 물이 흐르는 경사를 맞추기 위해 정밀하게 조정 된 것이다. 터널이 완성되자 사모스는 더 이상 부족할 게 없었고 고대문명이 활짝 피는 도시로 변모하였다. 도시로 흘러든 아이아테스 샘물은 더할 수 없이 풍요로운 목욕문화를 만들었다. 도 시 중심부에 있는 목욕탕에는 사슴이 조각된 화 관(花冠)이나 물고기를 낚아채는 독수리 상 등 화 려한 부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기원전 580년 이곳에서 태어난 피타고라스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금의 도시 이름은 피타고리온이라고 불린다. 8) 아이아테스 샘을 표고로 따지면 해발 58m다. 샘을 기준으로 위쪽은 급경사, 아래쪽은 완만하다. 9) 케르케테우스산(Mt.Kerketeus). 표고 1,433m로 주변이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10) 1스타디온은 185m, 1페키스는 4.6cm, 1푸스는 30cm 정도에 해당한다. 11) 샘에서 터널까지 구거식으로 만들어진 도랑은 900m, 터널에서 도시까지 도랑은 500m이다. 12) 사진출처) en.wikipedia.org, Tunnel of Eupalinos.jpg <에우팔리노스 터널>12)124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문지영 박사는 서울대학교 협동과정조경학과에서 <조선시대 교량의 문화경관 해석: 연결, 교감, 상징(2012년)>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유신 구조부에서 2003년부 터 2014년까지 장대교량을 중심으로 한 국내·외 교량경관설계업무를 주로 담당했 으며, 대학에서 강의 후 현재는 책과 칼럼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 저술서로는 ■내려놓기(2022년, 교보eBook) ■숫자로 보는 대한토목학회 70 년(토목 70(1951-2021), 그리고…)(2021년 공저, 페이퍼북+eBook), ■내가 사랑한 디노베이터(2020년 공저), ■서울대학교 토목공학의 100년 돌아보기(2016년 공저), ■자연과 문명의 조화, 토목공학(2015년 초판, 2018년 개정판 공저, 초판3쇄&2판2 쇄, 201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자연과학부문 선정, 2018년 개정판 공저), ■미학적으로 교량보기(2014년, 2015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자연과학부 문 선정, 2014년 대한토목학회 저술상 수상), ■상상 그 이상, 조선시대 교량의 비밀 (2012년 초판, 2015년 초판3쇄,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생 각을 말해봐(2015년 공저), ■현대 경관을 보는 열두 가지 시선(2006년 공저) 등이 있다. ■토목, 인생, 무엇이 궁금해?(2023년), ■다리 구조 교과서(2017년)는 감수 를 했으며, ■브릿지(2024년) 외국어서적 번역본 감수를 준비 중이다. 유튜브 SNU GSES 2022 Alumni Talk 50-‘나답게 : 토목과 디자인 그리고 조경의 경계를 넘나드 는 삶’ 영상에서 자세한 저자 소개를 담았다(2022년). 현재 도로교통협회 도로교통 저널에 <문화예술 속 교량의 미학>을 연재(2023년 봄호부터), 대한토목학회 학회 지에는 <문화예술 속 토목구조물의 미학>을(2024년 3월호부터), 본 한국터널지하 공간학회 학회지에는 <문화예술 산책>을(2024년 6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다. 지난 2024년 4월 17일, 본 한국터널지하공간학회 학회지에 <문화예술 산책> 주제로 연재(連載)를 부탁한다는 연락을 K교 수님으로부터 받았다. 필자는 대한토목학회 학회지에 문화예술 속 토목구조물의 미학 으로 매달 글을 쓰고 있고(2024년 3월호 부터) , 도로교통협회지 도로교통저널에는 문화예술 속 교량의 미학 으로 연 4회(봄· 여름· 가을· 겨울호) 기고하는 중(2023 년 봄 호부터) 이기에 살짝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 달 안에 3개의 연재 글쓰기 업무가 몰리게 되면 (내가) 과연 양질의 원고들로 준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짧고 굵게 고민한 후, 4월 20일 결단을 내리고 승낙(承諾)의 문자를 보내드렸다. 그리하여 오늘 그 첫 테이프를 끊는다. 2024년 6월호부터 시작하는 문화예술 산책 코너에서는 주어진 제목에 맞게 ‘산책(散策)’하는 자세와 기분으로 문화예술 (文化藝術)을 둘러보려 한다. 여기에서 ‘산책하는 자세’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하여 멀지 않은 거리를 천천히 거닒’을 의미한다. 외부 활동 중에 혹은 글 속에서 필자는 ‘글 쓰며 그림 그리는 작가 문지영’ 타이틀로 본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공학 박사 학위 소지자인 필자의 이력이 글 속에서 티가 날 것이다. 부드럽고, 감미로우며, 감동적이고, 예술성이 넘치는 문장과 표 현보다는 분석적인 뉘앙스가 종종 비칠 예정이다. 그래도 본 연재 기사 타이틀 속 ‘산책’이라는 키워드에 걸맞게 ‘가벼운 마음 과 발걸음’으로 독자 여러분과 동행할 참이다. 앞선 대한토목학회 학회지와 도로교통협회 도로교통저널 글 속에는 필자가 직 접 그린 그림들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 가능한 이곳에서도 그 일부를 선보이겠다. 문지영 | Moon Sie-young ∙ 공학박사 + 조경학석사 + 예술학학사 + 외국어고 ∙ 現 글쓰고 그림그리는 작가 ∙ 대한토목학회 출판도서위원회 위원장 ∙ 한국여성디자이너협회 이사 sieyoungmoon@gmail.comVol. 26, No. 2 125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화와 예술을 융합한 복합어(複合語)이다. 문화라고만 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고, 예술이라고 하기 에는 범위가 너무 좁기에 문화와 예술을 융합하여 예술 활동이 있는 문화를 지칭한다. 세부적으로 문화예술은 문학, 영상, 공 연, 전통, 음악 등 예술 및 문화 활동 전반을 포함한다 (위키백과에서 밝힌 ‘문화예술’에 대한 정의) . 필자는 (우선) 2년간 본 학회지가 배포될 즈음에도 진행 중일 ‘미술작품 전시회 소개’로 시동을 걸어보겠다. 창의(創意)가 강조되는 기술· 문화예술 융· 복합시 대를 살아갈 토목인(土木人)들이 문화예술을 직접 경험하는 기회가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술의 여러 분야 가운데 ‘미술’부터 선보일 계획이다. 참고로 필자는 외국어고등학교에서 영어· 독일어· 일본어를 전공했고(인문학), 미술대학 디자인 학부를 졸업한 후(예술학), 조경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자연과학). 졸업 후, 바로 ㈜유신 구조부에 입사하여 10년 이 상 국내· 외 장대교량설계 업무를 수행한 바 있다(공학). 이후 공학박사학위까지 마친, 다양한 분야에서의 경험을 몸소 익힌 융· 복합 인재(人才)?이다. 따라서 토목인들이 편하게 문화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맞춤형으로 쉽게 설명할 자신이 있다. 과거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철학자들(괴테, 헤겔, 하이데거, 칸트 등) , 세기를 뒤바꾼 위인들(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등) 은 ‘산책하기’를 즐겼다. ‘창의· 창조’와 ‘산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산책하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직관, 영감, 아 이디어’는 꽤 큰 영향력이 있다. ‘철학자의 길’과 같은 산책로(路) 명칭과 장소가 그냥 생겨난 게 아니다. 볕 좋은 시간대에 풍 경 좋은 곳을 하루 20~30분 정도 산책하면 비타민D 섭취를 포함하여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창조적인 에너지까지 모두 얻 을 수 있으니, 본 연재 기사 타이틀과 무관하게 오늘부터 운동화를 신고 문밖으로 나가보시길 추천한다. 이왕이면 연4회 오늘 부터 연재되는 문화예술 산책 에서 소개하는 장소를 직접 방문하시면 더 좋겠고.문화예술 산책 126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그림 1>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베르나르 뷔페 - 천재의 빛: 광대의 그림 입구 벽면 (ⓒ필자 촬영) <제1편> 베르나르 뷔페 - 천재의 빛: 광대의 그림展 문지영 <공학박사+조경학석사+예술학학사+외국어고>, 現 글쓰고 그림그리는 작가, 대한토목학회 출판도서위원회 위원장, 한국여성디자이너협회 이사Vol. 26, No. 2 127 <제1편> 베르나르 뷔페 - 천재의 빛: 광대의 그림展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가 질투한 예술가,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 1928~1999)1) 작품전이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1층(제1전시실, 제2전시실, 제3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2024년 4월 26일 (금)에 오픈했고 9월 10일(화)까지 진행된다. 오전 10시 입장을 시작으로 저녁 7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나 입장 마감 시 간이 오후 6시이므로 주의하시라. 매주 월요일은 미술관 휴관일이라는 사실도 메모하시길 바란다. 이번 전시의 타이 틀은 <베르나르 뷔페 - 천재의 빛: 광대의 그림>이다. 이번이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그의 두 번째 전시인데, 2019년 (2019년 6월 8일~9월 15일)에 첫선을 보였을 당시 타이틀은 <베르나르 뷔페: 나는 광대다, 천재의 캔버스>였다. 전시 된 그림 속 소재로 ‘광대’가 여러 번 등장하더라. 웃고 있지만 웃지 않는, 행복해 보이지만 동시에 행복해 보이지 않 는, 타인에게 보이는 자아와 본인만 볼 수 있는 내면의 자아를 ‘광대(clown)’라는 대상에 투영하여 ‘자아(自我)’를 표현 하고 있다. (조울증 환자 같은 뉘앙스로도 읽히기도 하더라) 그의 천재성은 직접 그림을 감상하는 가운데 온몸의 전율 로 체험할 수 있다. 심장을 강하게 강타하는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니 긴장하시라. 순간의 오싹함은 덤이다. 특히 폭 4 미터 크기의 대형 작품은 감동의 깊이를 더하니 오랜 시간 머물며 화면의 구석구석까지 감상하시길 권한다. 원본 그림이 걸린 제1전시장과 제2전시장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은 단 한 컷도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본 원고에 실은 일부 작품은 인터넷 자료에서 따온 것임을 미리 밝힌다. 이점이 참 많이 아쉽더라. 사진으로라도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 여럿 있었는데, 특히 그만의 고유한 표현기법(붓칠)은 그 재질감이 남달라 접사(接寫)로 찍어 간직하고픈 마음 이 굴뚝같았지만, 감히 촬영할 수가 없었다. (감시자 여러 명이 전시장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 이전에 기본적인 에티 켓은 지켜야 함이 맞겠고) 본 전시장에는 유화(油畫)를 비롯하여 수채화(水彩畵), 동판화(銅版畵 Copper-plate Print), 석판화(石版畵, Lithography), 믹스 미디어(Mix Media; 다양한 매체와 기법의 작품)가 선보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다수의 유화 작품에 자동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의 친필(親筆)이 참 멋지다(그림 1 우측). 힘이 있고 길이감이 강조된, 독특한 디자인 감각까 지 엿보이는 그만의 작품. 이 시그니쳐(signature; 서명)는 단순한 조형미로만 평가될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린 그림의 특징, 그의 마음 상태, 당 시대(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빈곤으로 육체가 앙상했던 사람들, 그래도 꿋꿋하게 생존하 고자 애썼던 사람들, 황폐한 도시풍경이 그의 그림에서부터 시그니쳐에 이르기까지 통일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뷔페는 구도(構圖)와 형태(形態)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 느낀 것들을 마구 그린 그에 게 세상의 모든 대상은 그리기를 위한 동기이자 주제였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경제적인 문제로 (물감을 충분히 구매할 수 없었기에) 색이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담백하기도 했고. 그가 그린 풍경화 대부분에는 사람이 등장하 지 않는데, 당시 전쟁으로 인한 피폐한 도시풍경이 반영된 것이리라. 사람들은 굶주림에 지쳐 활기차게 도시를 활보 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을 터이고. 인적이 드문 혹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고요한 장소에서 산책하기를 즐겼던 베르 나르 뷔페는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그의 행보는 그의 그림 속 선과 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단조롭지만 응축된, 1) 사람들은 뷔페가 피카소의 후계자라고 말하겠지만, 이제 피카소가 두려워하는 것은 뷔페의 재능뿐이다. (장 콕토; Jean Maurice Eugène Clément Cocteau, 1889~1963년, 프랑스의 시인 · 소설가 · 극작가 · 영화 감독 왈)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