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인문학 산책 58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수로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도로와 수로터널은 지금의 개착공법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물이 흐를 경사를 고려하여 깊이를 정하고 흙을 파낸다. 다음에 바닥을 고르고 석재를 깐다. 다음은 수로의 벽을 쌓고 화산재로 만든 시멘트와 역청으로 물이 세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지붕을 덮고 흙을 되메우 면 작업은 끝난다. ① 흙을 파낸다② 바닥‧ 벽체 설치③ 아치로 덮는다④ 흙을 되메운다 수로 터널 로마를 대표하는 가장 거대한 토목 구조물은 보통 도로를 꼽지만 정교함에 있어서는 수로를 앞설 수 없 다6). 측량이나 수리는 물론 모든 건축 기술이 총동원 된 시설물이며 미적으로도 탁월한 균형과 조형미를 갖 추고 있다. 수로는 모두 11개 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공급되는 물은 하루에 9억 8천만 리터나 되 었다. 천 개소가 넘었다고 하는 로마시내에 목욕탕을 흡족하게 채울 수 있는 수량이다. 형식은 고가식 지상 식 터널식 3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가장 일반적인 형 식은 고가수로와 지상수로였지만 구배를 일정하게 유 지해야하는 수로 특성상 터널구조를 피할 수가 없었다. 로마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건설된 수로는 기원전 312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건설한 아피아 수로다. 이 수로는 아니에네 강물을 16km 떨어진 로마 중심부까지 끌어온 것으로 규모나 기술적인 면에서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이후 6) 로마에는 테베레(Tevere)강이 흐르지만 수량이 많지 않고 지하수에는 다량의 석회분이 섞여 있어 물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로마 수로는 기원전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BC33년경에는 700여개의 샘이 관리되었다. 이 샘으로부터 11개의 수로를 통해 공급된 물은 로마시내 곳곳을 채울 수 있었다. 로마 전성기에는 500여개의 분수와 1000여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로마시대 수로(프랑스 가르강)Vol. 22, No. 1 59 물의 도시, 로마의 수로터널 기원전 272년 마니우스 쿠리우스(Manius Curius)가 건설한 아니오 베투스(Anio Vetus) 수로는 63km에 이르는 대부 분의 구간을 지하로 구축할 정도로 기술이 발전하였다. 기원전 144년 퀸투스 마르키우스(Quintus Marcius)가 건설한 마르키아 수로는 아치교(橋) 형식으로 건설되었으며 연장이 91km에 이른다. 이후 따듯한 물이 흐르는 테프라 수로(BC 125년)를 비롯하여 율리아 수로(BC 33년), 베르지네 수로(BC 19년), 가르 수로(BC 12년), 알시에티나 수로(BC 2년), 클라우디아 수로(AD 47년), 아니오노우스 수로(AD 52년) 등이 차례로 건설되어 로마를 물의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나름대로 특색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단연 베르지네 수로다. 처녀라는 뜻의 베르지네 수로의 물은 석회분이 거의 없고 깨끗해서 아직까지 로마를 대표하는 트레비 분수의 수원으로 공급되고 있다. 이 수로는 로마시내 에서 15km 정도 떨어진 루쿨라누스 샘물을 끌어오기 위한 것으로 터널과 고가교는 물론 사이펀 시설까지 갖추어 당 시 토목기술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사이펀은 물의 위치에너지와 중력을 이용하여 저부를 통과하는 기술로 수로 를 완전히 밀봉상태로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강관이나 PVC 등 파이프 기술이 발달한 현재는 어려움이 없 지만 석재와 시멘트만으로 이러한 공사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베르지네 수로(Acqua Vergine) 수원지는 지대가 높은 북동쪽 아니에네강 유역에 있어 경사조건이 유리하였으나 중간에 구릉이나 계곡이 많아 어 려움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구간마다 다양한 공법이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계곡부는 고가교를 설치하여 통과 할 수 있었지만 보다 깊은 고가교는 사이펀의 원리를 응용해서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산이나 높은 구릉은 터널로 통 과하였고 일반적인 구간에서는 구거(溝渠)7)를 적용하였다. 석재의 틈은 시멘트로 잘 매꾸어 물이 세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수로의 평균 폭은 1.5m가 조금 넘는데 이 정도면 작은 배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다. 로마 외곽의 언덕은 지하 30m 정도의 터널로 구축되었으며 구릉지인 파리올리 지역은 터널 깊이가 43m에 이른다. 7) 구거(溝渠). 일정한 깊이로 도랑을 판 다음 석재로 바닥과 측벽 덮개를 설치하고 흙을 되메워 물길을 만드는 개착식 터널 인문학 산책 60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배수로 터널 수로가 발달한 만큼 배수로 규모도 이에 못지 않았다. 물은 식수로 사용하건 생활용수로 사용하 건 들어온 만큼 반드시 강이나 바다로 내보내야하 기 때문이다. 배수로는 대부분 구거나 터널로 만 들어졌는데 이는 오염된 물을 가급적 지상으로 노 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로마 배수로의 역사는 로마가 설립되기 이전인 에트루리아8) 시 기부터 시작된다. 현재의 로마 광장(Foro romano) 은 팔라티노와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로 흘러들어 온 물이 테베레강과 만나는 곳으로 하천범람이나 홍수 피해가 심한 늪지였다. 이렇게 넘쳐 들어온 물을 배제하기 위하여 기원전 6세기부터 이 지역에 배수로 정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불모지였던 주변지 역에 거주인구가 늘어나면서 점차 석조 가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활발하게 도시화가 진행되어 로마의 중심광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9). 당시 배수로는 지금도 살펴볼 수 있는데 로마광장을 가로지르는 카부르 가도(Via Cavour)의 클로아카 마씨마(Cloaca massima) 배수로는 아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배수로에는 광장 주변의 수부라와 팔라 티노에서 나오는 모든 하수관이 연결되어 있어 로마가 물의 도시로 발전하는데 필수적인 기반시설이 되었다. 로마가 많은 물을 사용하면서도 위생적 환경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도로밑에 만들어놓은 배수터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수터널이 꼭 로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성곽이나 도시에는 하수를 강이나 바다로 내 보내기 위한 많은 배수시설을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유적들이 있다. ① 예루살렘 배수터널 히스키아 수로터널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유대인의 요새였던 예루살렘은 물을 사용하고 배수하는데 있어서도 로마 못지않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 제1성전인 솔로몬 성전은 기원전 586년 파괴되었지만 약 70년 후 유대인 은 그 자리에 다시 제2성전을 구축하였다. 하수터널은 제2성전의 기반석 아래에서 시작되어 간선도로 끝까지 이어져 있다. 이 터널은 건축물과 도로축조 시 사전계획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잘 다듬어진 석재를 사용하여 바닥면과 벽면을 8) 에트루리아. 이탈리아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12개 도시국가 연합체로 BC650년경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도로나 배수로 등 도시기반시설의 구축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9) 로마광장지대에 남아있는 레지아(Regia. 대사제청), 베스타(Vesta. 신전), 코미티움(Comitium. 민회) 등의 원형은 모두 BC7 세기 말 무렵에 건축된 것이다. 배수로 터널Vol. 22, No. 1 61 물의 도시, 로마의 수로터널 만들고 덮개는 큰 판석으로 설치하였다. 터널 연장은 약 800m에 이르며 높이는 3m 폭은 1m이다. 이 터널은 예루살 렘 남문을 통해 사해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기원전 70년 로마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유대인의 탈출로로 이용되었다고 한다10). ② 헤르쿨라네움11) 배수터널 로마 고대도시인 헤르쿨라네움은 서기 79년 베스비오 화산 폭팔시 품페이와 함께 묻혀버린 도시다. 도시 대부분이 화산재로 완전히 덮혔지만 땅의 건습조건이 특이하여 당시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목제가구는 물론 파피루스 문서나 그 릇조각 옷감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최근 발굴과정에서 약 86m에 이르는 터널이 발굴되었는데 단순한 배수로뿐 만 아니라 정화조 기능까지 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하수도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화조에는 고화된 인분과 도자기 장식품 동전 램프 등이 나왔는데 이것은 이물질이 배수로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거름막을 설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배수로와 정화조 그리고 하수관이 서로 연결되어 기능하도록 계획한 것을 보면 현대 하수시 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현재 간선도로망과 목욕탕 팔라이스트라(신체단련장) 피스키나(수영장) 공연장 등 이 발굴된 상태이며 시설물 하부에는 잘 정비된 배수로터널이 설치되어 있다. ③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 배수터널 티그리스 강 하구의 항구도시 셀레우키아(Seleucia)12)에 있는 1,380m의 배수터널로 바위산을 깍아 만들었다. 만들 기 시작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지만 완성된 것은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다. 그러나 이 터널은 생활하수를 배제하는 기능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목적은 홍수 시 신속하게 배출하여 도시가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0) 예루살렘 하수터널. 2007년 발견되어 발굴중에 있으며 총 800m중 현재 90m 정도 모습을 드러낸 상태다. 터널 내부 에서 그릇 조각이나 동전 등 생활필수품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탈출로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 곳에서 상당기간동안 숙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1)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나폴리 남동쪽 8km 지점에 있던 도시로 약 5천명의 인구가 거주하였다. 도시는 화산재에 완전히 묻혔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빠져나와 희생자는 많지 않았다. 12) 셀레우키아(Seleucia). 티크리스강 유역에 매소포타미아의 니카토르(BC312~281 재위)가 세운 도시. 마케도니아 그리스 유대 시리아인 등 60만 명의 다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초기에는 그리이스 로마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후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인문학 산책 62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고대 이란 종교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의 활동시기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역사가들은 상당히 오랜 옛날의 사건들이나 인물 들의 활동 시기에 대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런 것들 중에 1세기 경에 활동했 던 로마시대 역사가 플리니Pliny the Elder의 기록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에우 독서스가 고대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창시자 자라투스투라Zarathustra의 시 대를 플라톤이 죽은 때보다 6000년 전으로 언급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역산해보면 짜라투스투라는 기원전 6300년 경에 존재했던 것이 된다. 하지 만 이런 기록은 근대 이후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독일의 외교관이자 역사학자였던 크리스티안 분센Christian Charles or Karl Josias von Bunsen은 그의 저서 <역사 속의 신God in History>에 서 짜라투스트라를 기원전 3000년 경에 활동했던 인물로 보았다. 또한 오늘 날에는 대부분의 관련 학자들이 그의 활동 시기를 이보다 훨씬 이후인 기원 전 1200년 경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연대 추정이 더 정확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었다. 그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초고대 문명 유적지가 발굴되면서다. 1)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9/9b/CIMRM_44-Mithraic_pater_%28Dura_Europos%29_B.jpg/ 225px-CIMRM_44-Mithraic_pater_%28Dura_Europos%29_B.jpg 아나톨리아 고원의 초고대 문명과 농업의 기원 자라투스트라의 모습1) 맹성렬 우석대학교 교수Vol. 22, No. 1 63 아나톨리아 고원의 초고대 문명과 농업의 기원 인류 문명의 발생시기는? 인류 문명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최근까지 교과서적인 답은 5~6천년 정도 되었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이 집트, 인도, 그리고 중국에서 기원전 4천년에서 기원전 3천년 사이에 인류 최초로 문명이 발생했다는 것이 지난 백 여 년 동안 역사학계에서 가르쳐 왔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무려 1만 년 전에 계획을 세워 도시를 건설할 수 있는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20세기 말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 문명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로 차탈휘위크Çatal hüyük,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네발리 초리Nevalı Çori 등지에서 대규모 거석문명 유적지들이 잇달아 발견되면서 이런 사실이 확인되었다. 터키에서 이집트로 미국의 신석기 문화 전문가인 매리 세테가스트Mary Settegast는 오랫동안 기원전 5~6천년 경의 지중해 연안 유 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석기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그녀는 그런 문화들에서 비교적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 고 상당히 유사한 유물과 유적들이 발굴되는 데에 주목했다. 이미 당시에 상당한 교류가 그 일대에서 이루어지고 있 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그녀는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 모체 문명이 존재할 것으로 예견했었다. 그녀의 이런 예상은 상당히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 최근 확인되었다. 기원전 7000년 경 건립된 세계 최초의 도시 차탈휘위크Çatal hüyük에서 석기 단검 등 고대 이집트 왕국 형성기 유물들과 유사한 모티브를 갖는 유물들이 발견되 었던 것이다. 또 거기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 상징이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와 비슷했다. 그렇다면 그 문명의 실체가 무엇이었을까? 고대 이집트 게벨-엘 타리프Gebel el-Tarif에서 발굴된 석검 카탈휘위크에서 발견된 석검. 고대 이집트 석검과 손잡이의 두 뱀이 꼬여있는 모티브가 유사하다. 이런 모티브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란 유물에서도 발견된다.인문학 산책 64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세계 최초도시 카탈휘위크 1958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 남부에 위치한 차탈휘위크Çatal hüyük에서 제임스 멜라아트James Mellaart와 데이 비드 프렌치David French는 아주 오래된 선사 취락의 흔적을 발견했다. 1961년부터 멜라아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발굴 결과 그곳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무려 3000여 년이나 앞선 기원전 7500년 경부터 기원전 5700년 경까 지 대규모 취락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카탈휘위크 발굴현장(왼쪽), 그곳에서 발굴된 여신상(오른쪽) 카탈휘위크 맵Vol. 22, No. 1 65 아나톨리아 고원의 초고대 문명과 농업의 기원 관련 학계에서는 곧 취락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을 도시로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규모가 큰 촌락 이라고 봐야하는 것이었다. 취락이 도시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확인하려면 그것이 자연 발생적으로 불규칙하게 조성된 것이 아니라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취락이 직사각형 형태를 취하고 있어 도시처럼 보이긴 해도 계획된 것이 아니라면 도시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이 계획된 도시라는 증거가 나왔다. 바로 지도다. ‘차탈휘위크 맵’이라 명명된 이 지도는 1960 년대 발굴 작업을 하던 멜라아트에 의해 한 주거지 벽에 그려진 벽화 형태로 발견되었다. 처음에 그는 이것을 종교적 또는 주술적 의미를 가진 실내 장식으로 오판했는데 최근 지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도시 계획 유구 발견으로 마침내 고대 도시의 역사가 다시 쓰여지게 되었다. 이 지도는 차탈휘위크에 취락을 건설하기 위해 제작된 도시(취락)계획도로 간주된다. 지도에는 격자형 패턴에 가까 운 건물 배치와 도로계획이 담겨져 있으며, 특히 건물은 가옥의 실내까지 표시될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다. 차탈휘위크Çatal hüyük 유적의 원래모습 상상도2) 세계 최초도시의 건설 이유 그렇다면 차탈휘위크에 공식적인 세계최초의 도시가 건설된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 가설은 신석기 시대를 특징짓 는 농업혁명과 이에 따른 식량의 잉여로 인해 도시형성이 촉진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곳에서는 수렵 채취 2) https://www.emaze.com/@AICZRCCW/catal-huyuk인문학 산책 66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위주의 생활이 영위되고 있었다. 어떻게 수렵채취인들이 큰 집단으로 공동생활을 하게 된 것일까? 2000년대 이전에 는 그곳이 흑요석 교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라는 가설에 힘이 실렸다. 신석기 새 사람들에게 있어 흑요석은 여러 생 활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매우 중요한 자원에 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위한 교역의 장으로 도시가 형성되었을 수 있다는게 당시 학계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후 인근의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와 네발리 초리Nevalı Çori에서 거석을 사용한 대규모 신전들이 발견되면서 도시를 건설한 주요 동기가 강한 종교적 필요 때문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의 신앙과 관련된 신전들을 짓 기 위해 많은 인력이 요구되었고 그러다 보니 수렵채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농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농업이 기원전 5천년 전후로 그리스, 팔레스타인 등 지중해 연안의 다른 지역들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괴베클리 테페의 거대 신전들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는 ‘인류 최초의 신전’, ‘종교의 탄생’, ‘농업의 발명’, ‘초고대문명의 흔적’ 등의 수식어 를 갖고 있는데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의 지휘 아래 독일 고고학 팀에 의해 발굴되었다. 차탈휘위크에서 동 쪽으로 약 500킬로미터 떨어진 해발 760m 언덕에 위치한 유적이다. 유구(遺丘,tell)는 높이 15m, 지름은 약 300미터 에 달하며 지명 괴베클리 테페는 ‘배꼽 언덕’이라는 뜻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유구의 가장 오래된 부분의 건설 연 대가 기원전 9600년경이다. 엄청난 기후변동과 해수면 변동을 초래한 영거 드라이아스Younger Dryas 시기가 끝나 는 시점이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 흔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유구에 남겨진 구조물은 2단계의 발달이 보이는데, 첫 번째 단계엔 거대한 T자형 돌기둥이 원형으로 세워졌다. 현 재 약 20개의 원형 구역과 200개 이상의 돌기둥이 확인되었다. 각 돌기둥은 큰 것이 6m의 높이와 20톤의 무게를 가 지며 기반암bedrock에 구멍을 파서 세웠다. 두 번째 단계에는 앞선 시대보다는 작은 돌기둥들이 석회바닥을 가진 직 사각형의 방에 세워졌다. 이 시기가 끝나던 기원전 8200년 경 유적은 전부 의도적으로 매립되었다. 괴베클리 테페의 기둥들은 거칠게 깎인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되고 새겨진 석회석 기둥이다. 돌기둥엔 가젤과 사자, 야생 들소, 돼지, 영양, 여우, 독수리, 오리, 뱀, 전갈, 거미 등의 동물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 원인을 알 수 는 없지만 발굴 기록에 따르면 각 원형 구조물은 일정기간 사용되다가 흙으로 메워졌고, 바로 그 위에 비슷한 방식의 구조물이 다시 세워졌다. 특이한 점은 원형 구조물 건축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퇴보했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원형 구조물이 가장 크고 기 술과 공예 수준도 매우 발달했지만 후대로 진행됨에 따라 갈수록 조악해졌다. 괴베클리 테페는 거석, 도상학, 유적지 의 전반적 개념과 배치는 영국의 스톤헨지와 비슷하다. 괴베클리 테페의 발견은 인류사회의 발전에서 결정적 단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게 해준 아주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된다. 스탠포드 대학 교수인 이안 호드Ian Hodder는 “괴베클리 테페가 모든 것을 변하게 했다.”고 말한다. Vol. 22, No. 1 67 아나톨리아 고원의 초고대 문명과 농업의 기원 농경사회의 도래로 인한 식량의 과잉에 의해 도시가 성립했다는 기존 학설이 수렵 채집 사회에서 만들어진 이 도시의 발견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의 천이과정을 놓고 “최초에는 신전, 그 다음에 도시 Zuerst kam der Tempel, dann die Stadt(First Came the Temple, then the City)”라고 표현했다. 인류 최초의 인구 밀집에 의한 도시 형성이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거대 규모의 신전 건축을 위해 사람들이 장기간 모여 살게 되다 보니 수렵 채집 만으로는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짓게되었다. 실제로 괴베 클리 테페에서 머지 않은 네발리 초리라는 곳에서 세계 최초로 밀 재배가 시작되었다.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전경3) 네발리 초리 괴베클리 테페를 해석하는 데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어떻게 이러한 건축에 필요한 조직 노동력과 문화가 농업이 나타나기 전에 가능했냐는 점이다. 아직까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농경지나 거주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 만, 괴베클리 테페와 비슷한 양식의 돌기둥과 조각들이 인근의 후대 유적인 네발리 초리Nevalı Çori에서 발견되었는 데 여기엔 집터들과 원시적인 밀농사 흔적이 있었다. 3) http://www.hurriyetdailynews.com/chinese-flock-to-gobeklitepe-145787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