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특별기고 48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에 가능 한 것이다. 주방을 보조해주는 알제리 여인도 몇 년 동안 훈련(?)을 받아 이제는 웬만한 한국 음식을 곧잘 만 든다. 이렇게 4년 동안 지내다 보니 먹는 문제만큼은 어느 누구도 불만이 없다. 철 따리 계절 음식을 만들고 묵을 쑤 어 먹고 식혜를 먹기도 하고 때때로 식사 차림을 사진을 찍어 집사람한테 보내면 “서울에서보다 잘 먹네요.”하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2018년 12월 필자가 치통 때문에 쩔쩔 맬 때는 별도로 죽을 쑤어 주고 점심에는 사무실까지 가져온 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주어 상당히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흐뭇하고 기분 좋은 것은 업무와 관련된 일의 성과일 것이다. 왜냐하면 감리의 신분이 라는 것이 발주청으로부터 기술력에 대한 인정을 못 받고 존재감이 없다는 지적을 받거나 하면 그 순간부터 불안해지 기 때문이다. 발주청은 냉정하다.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느끼면 웬만한 것은 눈감아 주지만, 도움이 안되거 나 기술력이 의심스럽다면 가차없이 해당 감리원 교체 지시 공문을 작성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시공사 직원들이나 현장 포어맨(십장)들에게 웃는 낯으로 껌이라 도 주면서 “너 일 잘한다.”하면 아주 좋아하고 금방 친숙해 진다. 그 분위기가 형성되면 현장에서 지적을 해도 거부 반응보다는 순응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부족한 점이나 잘 못되는 일이 반복될 때에는 사무실에 불러 모아 이론적인 내용을 포함하여 지적 사항에 대하여 왜 잘못 되었는지를 근거를 제시하면서 설명해주고, 터널의 변위에 불안해하면 경험에 의한 예측을 강하고 자신 있게 강조를 해주면 처음에는 긴가 민가 하지만 수 일이 지나고 실재 변위 발생과 일치하는 것을 보고는 신뢰의 눈빛과 미소를 보내 준다. 시공사가 공사 방법에 대하여 고집을 부리거나 개선을 시킬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관련자료를 p.p.t 발표 자료로 만들어서 발주청 담당국장한테 브리핑을 하면 대부분은 발표자 의 손을 들어준다. 이러한 방법은 시공사가 내 말을 듣도록 현장 분위기를 변환시키기도 했다. 나중에는 현장 사항에 의문이 있을 때 시공사 소장까지도 “무스 서한테 승인 받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물어보고 해라.”라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가 감리 생활을 헛되게 하지 않았구나 하는 흐뭇함이 가장 즐거운 일 중의 하나였다. <사진 5> 발주청에서 공사 현황 설명Vol. 22, No. 1 49 해외건설공사 감리 수행을 하며 느낀 희로애락 2.2 조심스럽고 힘든 일들은 무엇일까? 아직은 해외건설 현장에 투입되는 것이 해외 메이저급 용역사들처럼 역사가 깊지 않고 아직은 초기라고 볼 수 있 으며 해외 수주를 활성화 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도 GNP 5천불 시대부터 SOC 사업이 활성화 되어 단군이래 최대 건설 호황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이제는 3만2천불 시대에 들어서서 시급한 SOC 사업은 얼추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토목 분야가 한물간 것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밖을 둘러보면 세 계 도처에 GNP 5천불의 나라들은 도처에 깔려 있어 우리가 해외에 나가서 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도시거나 지하철은 한번 시작을 하면 멈추기가 곤란하다. 노선이 연장될수록 교통 효과와 도시 기능 활성화의 시너지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국내의 토목설계용역사들은 설계와 감리의 순환근무 체계가 아니고 각각 분리되어 업무를 수행한다. 기업 경영상 수주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대기 인력을 미리 확보해 놓을 수도 없고, 갑자기 해외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되면 설계 인 원을 빼내어 투입할 형편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급하게 스팩에 맞는 기술인력을 외부에서 특채를 통해 수혈하게 된다. 이렇게 급하게 감리단이 구성된 상태로 현장에 투입하게 되면 감리원들은 현지에서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각자의 과거 이력이 다르고 살아 온 과정도 다르기 때문에 초기에는 서로들 조심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신혼부부들이 신호 초에 다투거나 싸우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치약 짜 는 방법, 수건 사용 후 취급 방법, 양말 벗어 놓는 것 등 서로 습관이 다르니 상대방 행동이 어설퍼 보이고 낭비적으 로 보일 경우 지적이 반복되다 보면 감정이 쌓여 싸우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은 성인들이 감리 수행을 위해 모인 경우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으므로 내 주장을 접고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매사를 조심해야 한다. <사진 6> 숙소에 철도부문장 방문<사진 7> LOT2감리단 중국집 회식(도화+유신)특별기고 50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사진 8> 숙소 건물 : 왼쪽 끝<사진 9> 숙소 건물 출입문 : 도화 팻말 부착 예를 들면 가옥 한 채를 전세로 얻어 7~8명이 공동 생활을 하게 되는데 각자의 행동 양태와 습관이 다르고, 샤워 시간이 다르고, 식성이 다르다. 긴 세월 가족과 떨어져 불편한 해외 생활에서 느긋한 마음을 먹고 인내심을 잃지 말아 야 하는데 좀 예민한 성격의 사람은 공동 생활에 적응을 못하여 개인 비용이 들더라도 독립해 나가기도 한다. 주말 전날인 목요일 저녁에는 둘러앉아 맥주나 와인을 들며 담소를 나누기도 하며 정보를 교환한다. 평일에는 저녁 을 먹고 나면 산책을 갔다 오는 직원도 있지만 대부분 방콕 생활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철저히 남을 간섭하지 않고 개인주의 생활에 익숙해져 간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노크하는 일은 절 대로 없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와이파이가 설치되어 있어 가족이나 국내의 관계망과 소통은 자유롭고 유튜브를 통해 다양하게 개인 취향에 따라 접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고 나면 어떤 사람한테 골든 타임이 필요한 위급 상황이 발생해도 출근 용 차량에 탑승할 때까지는 알 수가 없는 취약점도 있다. 우리 감리단은 현지인을 제외하고 한국인 30대 2명, 40대 1명, 50대 6명, 60대 2명, 70대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항아리 형 나이 분포를 보면 적당한 것 같은데 세대별 관심사항과 걱정거리는 제각각 다르다. 한 가지 장점은 인생 경험을 통한 충고 와 상담을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또 한 가지를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공직에 있던 분들이 하는 말이 있다. “업계에 나와 어깨를 조금만 낮추 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어.”하는 말이 있다. 이러한 것은 업계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소속사에 서 퇴직을 하고 바로 감리에 참여하게 된 경우 잠시 고뇌에 빠질 수도 있다. 전에 있던 회사에서보다 처우가 적거나, 같은 처지의 과거 동료가 좋은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자신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거나 할 경우 갈등 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기술 인생의 흐름은 누구나 필연의 과정을 거쳐 현 위치에 와있는 것이다. 문장에 if 가정 문을쓴다면 인생 항로를 여러 갈래로 상상할 수 있겠지만 우리 모두 “현재의 내 위치가 최선이다.”라는 말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업무에 임해야 정신건강에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Vol. 22, No. 1 51 해외건설공사 감리 수행을 하며 느낀 희로애락 <사진 10> 발주청 국장 참석 메쉬이 회식<사진 11> 회식후 단장실 환담 : 왼쪽부터; 단장, 재무국장, 담당국장, 주감독 발주청과의 관계설정 중에 좋은 효과를 보이는 메쉬이(méchoui) 회식이 있다. 올해로 4번째로 매년 10월~11월 중 에 감리단 회의실에 통째로 구운 양(羊) 네 마리를 차려놓고 발주청 간부들과 현지인 기술자를 포함한 감리단 직원 전 체가 모여 회식을 하는데 분위기도 좋고 다들 만족해 한다. 발주청 국장들은 1~2명 빠질 때도 있지만 해마다 거의 다 참석하는 편이다. 메쉬이는 알제리에서도 귀한 음식으로서 웬만하면 메쉬이 회식 초대를 거절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자리에는 알코올성 음료는 제공되지 않는다. 끝으로 꾸스꾸스를 먹고 나면 곧바로 일어난다. 국내의 회식 분위기 와는 완전히 달라 비용 부담도 크지 않다. 식사가 끝난 발주청 간부들은 단장실에서 다과를 곁들여 20~30분간 담소 를 나누다가 내년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분위기를 살펴볼 때 이는 발주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감리를 하는 동안 치아 4개를 잃었는데 요즈음도 치통으로 한 달째 고생을 하다가 며칠 전부터는 반찬에는 손도 못 대고 밥을 국에 말아 우물거리다가 목구멍으로 넘길 때는 얼굴을 찡그리고 간신히 넘기는 모습을 보더니 품 질관리책임자가 죽을 쑤어 준다. 오늘 점심에도 현장사무실까지 죽을 갖고 와 전자레인지에 데워 준다. 참으로 고마 운 일이다. 앞으로 귀국일(12월 11일)까지 열흘간은 단단히 신세를 져야할 형편이다. 귀국 후 바로 치과에 가서 치아 2 개를 발취하면 해외근무 동안 도합 6개의 치아를 잃어버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감리를 하고 있거나 할 예정인 경우에는 유의해야할 사항이 또 하나 있다. 감리 대가는 근무일 수에 따라 받은 것 은 일일 근무 시간도 정확히 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현지인들은 오전 8시에 근무를 시작하여 오후 4시에 퇴근을 한 다. 한국인 기술자들은 점심시간 30분을 인정받아 오후 4시 30분에 퇴근을 한다. 업무가 몰려서 숙소에서 잔여 업무 를 처리해야하는 일부 직원을 제외하고는 15시간 30분은 완전 자유시간이다. 공자 말씀에 “소인이 한가하면 잡 생각 만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다 보면 망상에 빠지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알제리는 무슬특별기고 52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림 국가이지만 국내에서 파견 온 목사가 운영하는 교회도 있고 매주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도 있다. 교민과 한국건설 회사 직원들이 모인 테니스 모임도 있으니 다양한 생활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오지(奧地)에 건설되는 철도 현장보다는 도시에서 건설되는 지하철 현장이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은 편이다. 술좌 석이나 담소를 나눌 때 가끔씩 듣게 되는 말이 있다. 50~60대 직원들은 “서부사장님 나이만큼 일합시다.”라는 말이 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알제메트로 1호선 연장선 LOT2구간 건설 프로젝트는 약 10여년에 걸쳐 장기간 진행될 예정이다. 필자는 44개월간 근무하고 중간에 귀국을 하지만 나머지 직원들은 6여년을 더 근무를 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한 구간의 지하철 노선이 결정되면 여러 개 공구로 나누어 동시 에 발주하여 개통 시기를 맞추지만 알제리에서는 재정 형편과 인프라 공사는 로컬 국영 업체인 코시데(Cosider社) 단 독으로 시행하기 때문에 발주 구간의 토목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2km 정도로 추가 물량을 준다. LOT2 구간은 전체 연장 6km157m인데 1차 2km570m를 발주하여 연장 1km686m 구간의 토목공사가 마무리 될 즈음 PK 4k281까지 지 하 정거장 1개 포함된 연장 1km711m의 물량이 추가 되었다. 이 추가 물량도 4년은 걸려야 마무리 될 것인데 종점까 지 지하 정거장 2개가 포함되는 연장 1km876m가 또 남아 있다. <사진 12> 알제메트로 지하철 계획도 : LOT3구간 2020년 전반기 발주 예정 이렇게 장기간 프로젝트가 진행될 경우에 직원들에 대해서 특히 단장에 대해서는 별도로 고려해야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직원들의 경우에는 중간에 교체 투입할 수도 있지만 단장의 경우에는 사업 추진의 일관성 유지를 위하 여 장기간 근무를 해야하는 중압감이 있기 마련이다. 일 년에 3회씩 휴가가 부여된다고는 하지만 개인사(個人私), 가 정사(家庭私), 집안사(집안私) 등을 포함해서 국내의 관계망 단절이나 소외를 우려하게 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대학 에서 시행하고 있는 안식년 제도를 준용하여 1년은 아니더라도 다만 얼마라도 잠시 쉬는 기간을 주는 배려를 하여 장 기간(10년예상) 근무자의 사기를 진작(桭作)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Vol. 22, No. 1 53 해외건설공사 감리 수행을 하며 느낀 희로애락 3. 나가는 말 귀국 일주일을 남겨두고 그동안 지내온 해외 감리 생활에서 느낀 점을 두서없이 적어 보았다. 도화엔지니어링 철도 부문은 페루 리마,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아, 베트남, 네팔, 알제리, 탄자니아 등에서 철도 및 지하철 건설사업에 설계 및 감리에 참여하고 있고 파나마, 미국 LA, 인도네시아, 코스타리카 등 기타 여러 나라에서 수주 활동에 전념하고 있 다. 나라마다 도시마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감리 생활의 희로애락 또한 제각기 다르다고 생각한다. 직접 체험을 해보아야 체득하고 나름대로의 적응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우리가 상대하는 나라들은 우리 보다 소득과 기술 수준이 낮다. 아무리 우리나라보다 못하고 초라하게 보이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들은 발주자이므로 그들이 요구하는 성과를 제공해야 하는 우리들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예절을 지켜야 하고 기술력으로 압도해야 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입찰제안서나 절차서 및 설계 도서는 노하우가 축적된 세계적인 용역사들이 작성한 것이니 감 리 현장에 투입되는 기술자들은 항상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이제부터는 현장에 투입 되는 일은 없겠지만 후배들의 활약상을 기대해 본다. 끝. [본 기사는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한국터널지하공간학회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54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학생기고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학부과정 때 저는 학과 후배들과 함께 대한토목학회 모형구조물 공모전에 참가한 적이 있습 니다. 그 때의 모형구조물의 주제는 해저터널이었습니다. 공모전에 참가했을 당시 저는 학교성적도 우수하고 자격증 도 취득하였으나 터널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학부 때 배운 기본적인 이론이 전부였습니다. 터널의 배경지식이 많지 않은 우리팀은 아이디어와 미관에 치중했었고 우리팀의 의견과 달리 지도교수님은 터널에 대한 이론적 Background 를 토대로 공학적인 요소도 매우 중요하다고 지도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나도 많은 공정이 진행되어 그대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상에 대한 욕심을 많이 내었을까요? 결과는 장려상에 그쳤고 더 큰 상을 받지 못한 아쉬움과 지도교수님의 지도에 따르지 못한 것을 현재까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후 부족한 전공지식을 배우기 위하여 대학원 진학했고 기존문헌 연구의 중요성과 함께 연구의 Process, 실내시 험, 수치해석 등을 익히며 학부과정 때의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열심히 배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국책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서 최근 제게 가장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난 2019년 9월 17일부터 21 일까지 개최된 ‘The 2019 International Conference on Tunnels and Underground Spaces(이하 ICTUS 19)의 참석 이었습니다. ICTUS 19는 제겐 지난 모형구조물 공모전의 기억과 더불어 터널과 지하공간에 대한 분야를 좀 더 깊이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논문발표가 아닌 학생 도우미로 참석하였지만 터널과 지하공간에 대해 어떻게 연구하고 또 사용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구는 미국 Colorado School of mines의 Prof. Jamal Rostami의 ‘Underground construction on the moon’과 오스트리아 TU Graz의 Prof. Thomas Marcher의 ‘Long infrastructure tunnels - future trends and challenges’라는 주제였습니다. ‘Underground construction on the moon’에 대한 연구는 달에 후회와 다짐 그리고 성장 윤환희 동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건설공학과 박사과정Vol. 22, No. 1 55 후회와 다짐 그리고 성장 터널을 굴착하는데 있어 앞으로 해결해야할 문제점과 그 문제점 해결을 위한 방안 등 달 궤도에 우주정거장과 달 기지 를 건설을 위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듣고 매우 흥미로웠으며, ‘Long infrastructure tunnels - future trends and challenges’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유럽 알프스를 관통하는 터널 프로젝트를 통해 데이터의 디 지털화가 터널의 설계 시 시간과 비용을 얼마나 절약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진행된 학회임에도 다수의 학자들이 참석하였고, 적극적인 질문과 서로간의 교류를 하는 모습은 언 젠가 저도 터널에 대한 지식을 채워나가 연구도 수행하고, 더 나아가 다음 국제학술대회에서는 직접 논문발표도 해야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번 학회에 참석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자들의 발표를 들을 수 있 었으며, 터널과 지하공간의 국제적인 가능성과 방향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학부과정 때의 후회와 다짐, 대학원 진학 후의 성장... 저는 이번 ICTUS 19 참석을 계기로 앞으로 남은 대학원 생활 동안 꾸준히 노력하여 지반공학 및 터널 분야에 훌륭 한 인재로 거듭날 것을 마음속에 새겨 봅니다. <그림 1> ICTUS 19에서 지도교수님과 함께<그림 2> ICTUS 19 단체 사진인문학 산책 56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로마는 왜 멸망했을까. 도덕적 타락, 고트족의 침입, 배타적 종교...... 사람들마다 다양한 근거를 내놓는다. 그러나 나는 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의 도시 로마로 들어오던 11개의 수로가 파괴되었을 때 로마인의 삶은 더 이상 지탱 될 수 없었다. 트레비 분수1) 1) 사진출처) http://en.wikipedia.org, Trevi Fountain, Rome, Italy 2-May 2007.jpg 물의 도시, 로마의 수로터널 김재성 (주)동명기술공단 부사장Vol. 22, No. 1 57 물의 도시, 로마의 수로터널 로마에 물이 없다면 로마는 오랫동안 제국이 지속된 것도 놀랍지만 쇠락과정이 그렇게 빨리 진행된 것도 아이러니하다. 물론 서로마 멸 망 이후에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동로마는 천년을 더 지속했지만 말이다. 로마 멸망에 대하여는 다양한 의견이 제 시된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종교에 너그럽던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채택하므로서 표용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한 에드워드 기번은 도덕적 타락을 첫 번째 이유로 꼽는다. 최근 ‘로마 멸망 사’를 쓴 에드리언 골즈워디는 거대한 몸집 때문에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모든 이유가 나름대로 로 마 몰락에 영향을 주었을 것은 분명하지만 나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로 물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2세기경부터 로마를 침략하기 시작한 고트족2)은 아우렐리아누스 시절에는 발칸반도와 다키아3)를 차지하고 급기야 로마 본토까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로마는 273년부터 쌓아온 아우렐리아누스 성곽으로 철옹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 안에 너무 많은 인구가 산다는 것이었다. 고트족 침입 시 사람들은 재빨리 성안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물을 공급하는 수로와 안락한 삶을 보 장하던 식량과 물자는 적에게 무방비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트족이 수로를 파괴하고 물자 공급망을 차 단하자 성안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팽창기의 로마가 건설한 대규모의 수로가 수축기에는 로마의 멸망을 재촉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수로가 파괴되자 음식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식수마저 구하기 어 려워졌고 불결한 환경으로 전염병이 나돌았다 4) . 실제로 로마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고트족의 칼보다 그들이 옮 겨온 전염병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5). 이렇게 쇠약해진 서로마는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완패한 뒤 스스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고트족인 오도아케르와 그의 아들 로물루스에게 황제자리까지 넘겨주면서 476년까지 근근히 연명하였다. 그러나 로마 멸망의 서곡은 모든 수로가 파괴되었을 때 이미 시작된 게 아니었을까. 어떻게 만들었을까 초기에 만들어진 수로는 단순하게 도랑을 파고 석재로 바닥과 벽면을 설치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차츰 도로를 놓을 때 수로 또는 배수로를 함께 계획하여 만들어 나갔다. 도로의 경우 산을 뚫어서 길을 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수로는 주로 위에서 아래로 일정깊이로 판 다음 토관을 묻거나 터널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깊이나 규모 또는 수로와 배 2) 고트(Goat)족. 게르만족의 일파로 2세기 후반 남하하기 시작하여 반달족과 기존의 게르만 세력을 정복하였다. 서로마를 멸망에 이르게 했으나 이후 동로마와는 평화롭게 지내며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3) 다키아(Dakia). 현재 루마니아 인근지역으로 도나우강 북쪽에 해당한다. 4) AD166년부터 16년을 주기로 발생한 전염병과, 252년의 전염병은 인구의 30%를 병사시켰으며, 452년 게르만족의 침입 직후 발생한 전염병은 로마를 완전히 황폐화시켜 100만이 넘던 인구는 3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5) 4세기말부터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훈족과 게르만족의 로마침입은 군사적인 피해보다 이들에 의해 옮겨진 천연두로 인한 피해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침입 전에도 로마는 높은 인구밀도와 인종교류로 전염병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었다.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