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주암칼럼 J. of Korean Inst. Resources Recycling Vol. 29, No. 2, 202096 연구실 실장이상기 연구 과장한정인 ( 후 본사 기술부장 ) 2010 년대 초반으로 기억된다 . 연화광업소 선광공정 조업의 달인인 김형태 , 유택수 두 분을 따라 한전 영흥화력발전소 영내에 건설한 코셉머티리얼 (KOSEP Material Co.) 주식회사의 견학을 하였다 . 이 회사는 아주 드물게 보는 Fly ash 의 부 선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 Fly ash 중의 순도 높은 탄소 ( 炭素 ) 회수가 목적이었다 . 반갑게도 옛날 연화광업소의 안준범 계 장이 이 회사의 건설본부장을 맡고 있으며 ,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 이마를 맞대어 현상을 주시하고 토론하던 연구 동료들 이지만 , 4-50 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다 . 나의 전공분야에서 대표적인 국제회의는 International Mineral Processing Congress(IMPC) 이다 . 제 18 회 IMPC 가 1993 년 5 월 23 일 -28 일 호주 Sydney 에서 개최되었으며 , 나는 ‘Sulphide Mineral Flotation by using Portland Cement as a Depressor’ 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하여 청중의 관심을 끌었다 . 그때의 발표수단 (1970 년대는 두루마리 종이에 매직펜으로 적어서 발표하였다 . 2003 년까지는 OHP 를 사용한 기억이 나며 , 그 후 CD, USB 로 바뀌었다 .) 은 OHP 였다 . 논문 내용을 OHP Film 에 복사하여 Film 을 Projector 에서 비추었다 . 영풍광업의 선광부장이었던 송진곤 ( 宋鎭坤 ) 씨가 호주로 이민 와 서 University of New South Wales 의 Scientist 로 선광실험실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 김명준 박사 ( 현 전남대학교 교수 ) 가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었다 . 이 두 분이 내가 강연할 때 Project 조작을 도와주었다 . ◎ 선광 ・ 제련의 현장을 찾아서(2) - 비철제련의 역사 우리나라에 있어서 소위 현대적인 비철금속제련업은 1936 년 충남 장항에 건설한 장항제련소가 그 효시이다 . 이 제련 소는 당초 금 ・ 은제련을 목적으로 조선제련주식회사에 의해서 건설되었지만 1943 년 삼성광업주식회사 ( 三井物産계 ) 로 넘 어가 본격적으로 동제련을 개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종전 , 동란 등에 의하여 소속이 바뀌고 또는 조업이 중단되는 시기도 있었지만 하여튼 장항제련소는 1960 년대의 상반기까지 우리나라 제련업의 명맥을 유지한 유일한 제련소이다 . 1959 년에는 선광공장 ( 처리능력 35 톤 / 일 ) 을 지어 운영한 것이 이 제련소의 특징이다 . 기록에 의하면 1981 년까지 금 ・ 은 광 , 동광 , 혼합광 , 전로슬래그 등을 처리하였다 . 최문성 ( 崔文星 ) 사원 (1965.7.20.-1968.3.25.), 김형태 ( 金亨泰 ) 사원 (1968. 4.20.-1970. 3.17.) 이 선광과장을 맡았으며 , 이용학 ( 李龍鶴 ) 사원 (1968.4.20.-1970.5.9.) 이 연구실 과장을 맡고 있었다 . 1964 년 이 장항제련소에 연제련공장을 , 1965 년에는 동신화학 ( 주 ) 가 아연제련공장을 건설 , 가동함으로서 동제련에 이어 연 ・ 아연 제련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 그리고 1969 년에는 울산에 알루미늄제련소 ( 대한알루미늄 ) 가 건설되었다 . 이와 같이 1960 년대에는 기초소재산업으로서 제련업의 비중이 강조되어 3 개소에 제련공장이 건립되었지만 모두 그 규모가 작고 동신화학 , 아연제련공장 ( 전기아연 2,500 톤 / 년 ) 과 같은 경우는 얼마 안 되어서 폐쇄되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 다 . 1970 년대는 금속제련업이 타 산업과 더불어 현대화된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 1970 년에는 ( 주 ) 영풍이 경북 봉화군 석 포에 석포아연제련소를 준공 , 가동 9,000 톤 / 년의 아연생산을 개시하였다 . 한편 ( 주 ) 영풍과 영풍광업 ( 주 ) 를 대주주로 한 고려아연 ( 주 ) 는 1978 년 온산 비철금속공업단지 내에 년산 50,000 톤의 아 연제련소를 건설 준공하여 아연생산을 개시하였다 . 그리고 이 아연제련소와 인접해서 년산 전기동 80,000 톤의 온산동제 련소가 1979 년에 준공되었다 . 1974 년 5 월 정부 주도하에 한국동제련주식회사가 설립되고 2 년 후에 공사 착공 시운전을 거쳐서 1980 년 6 월 조업에 이르기까지 이 온산동제련소에는 6 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 1980 년대는 특기할 만한 제련소 의 탄생은 볼 수 없었지만 제련시설의 정비 확장 및 부산물의 회수 그리고 기술개발의 측면에서 볼 때 제련산업의 성장기 라고 할 수 있다 . 1982 년 한국광업제련 ( 주 ) 는 온산동제련 ( 주 ) 를 합병 럭키금성 재벌의 계열사로 되었다 . 따라서 일사 이제련소 체제로 주암칼럼 97 자원리싸이클링 제 29 권 제 2 호 , 2020 되었으며 1983 년에는 장항제련소의 귀금속 회수시설을 온산으로 이전 통합하였다 . 1983 년이 되어서 비로소 조업 정상화 를 이룩한 이 온산제련소는 계속적으로 기술개선을 실시하여 1986 년부터는 년 10 만 톤의 전기동을 생산하였다 . - 금속제련분과위원회 현지연구회 1980 년 7 월 31 일 ( 목 ), 고려아연 ( 주 ) 온산제련소에서 필자의 주관 아래 대한금속학회 금속제련분과위원회 제 1 회 현지 연구회를 개최하였다 . 필자가 금속제련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 전술의 비철제련 역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 이 1978 년에는 고려아연 ( 주 ) 가 50,000 톤 / 년의 아연생산을 개시하였고 , 1979 년에는 동 년산 80,000 톤의 온산동제련소가 준공되었다 . 즉 1980 년은 우리나라 대형 비철제련산업이 출발하는 시점이었다 . 이러한 시기에 비철제련에 관련된 현장기 술자 , 연구자 및 대학교수가 한자리 ( 현장 ) 에 모여 공장견학 , 주제발표 , 토의 , 간담회 순으로 현지연구회를 개최하였다 . 별지는 대한금속학회지 (Vol.18, No.4, 1980.9.) 에 수록되어 있는 당시의 분과위원회 보고서 ( 전 11 페이지 ) 중 첫 페이지 이다 . 필자가 이 페이지를 실은 것은 참가자 명단이 여기에 게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 지금은 고인이 되고 , 또 현역에서 은 퇴한 40 년 전의 비철제련의 선후배들이 여기에 총 망라되어 있다 . 가장 원로선배는 박평주 교수 ( 서울대 ), 김택진 전무 ( 온 산동제련 ), 이용근 학장 ( 오산공전 학장 , 전 전북대 교수 ) 을 들 수 있다 . 백영현 박사가 고려대에 취임하기 전이다 . 까마득 하게 잊은 40 년 전의 옛 동료들의 이름과 직장을 확인할 수 있어 감개무량하다 . 격동과 시련을 겪고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을 발전시킨 용사들이다 . 1 인당 GDP 가 1,600 불 시대 , 현재에 비해서는 말할 수 없이 가난하였지만 나라를 건설한다는 희 망이 있고 , 의욕이 있어 행복하였다 . 끝으로 당 보고서의 후기를 여기 첨부하여 40 년 전의 비철제련 가족의 모임을 상기하고자 한다 . 후 기 본 현지연구회 개최에 있어서 온산비철공업단지의 여러 회사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았습니다 . 특히 고려아연 온산제련소는 각별한 배려가 있었습니다 .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 그리고 지면관계상 주제발표내용을 상당부분 삭제하였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 2 시간 20 분간의 토의는 발언을 억제해야 될 만큼 진지하고 활발하였으며 시간이 아쉬웠습니다 . 3 대의 녹음 기로 발언내용을 가급적 충실히 수록하였습니다 . 단 누락된 것이 있어도 양찰바랍니다 . 간담회에서는 약 50 명의 회원이 고려아연제련소의 식당에 모여 회식을 하면서 현지연구회의 여담을 나누고 친목을 도모하며 한때를 즐겼습니다 . 이번 경험을 살려서 제 2 회 현지연구회는 더욱 알찬 모임이 되도록 노력하 겠습니다 . (2020 년 2 월 14 일 기 )주암칼럼 J. of Korean Inst. Resources Recycling Vol. 29, No. 2, 202098 ◎ 별 지주암칼럼 99 자원리싸이클링 제 29 권 제 2 호 , 2020 ◎ 생각나는 사진들 우리나라 선광연구의 군상(群像), 1968년 10월 28일 국립광업연구소에서 선광 ・ 제련 분야 최초 세미나 개최 우리나라 선광연구의 군상(群像), 1973년 9월 8일 제2회 선광 ・ 제련 세미나를 마치고 국립지질광물연구소 가리봉동 현관에서주암칼럼 J. of Korean Inst. Resources Recycling Vol. 29, No. 2, 2020100 국립광업연구소 대전광물시험소에서 부선 pilot시험 광경(上東광산 회중석) 좌측 세번째부터 故 김재순, 김금봉, 필자(1967. 10.) 중국광야공정학회에 참석 후, 1981년 11월 台北 國賓大飯店에서 필자, 시모이자카(下飯坂) 교수와 사모님주암칼럼 101 자원리싸이클링 제 29 권 제 2 호 , 2020 1984년 2월 10일 동북대학에서 시모이자카 교수, 필자 조동성 교수(인하대), 김영삼 대학원생(후 동아대 교수) 최형섭 박사님(오른쪽), 와세다대학 原田種臣 교수님(왼쪽)과 같이(1991년 5월)주암칼럼 J. of Korean Inst. Resources Recycling Vol. 29, No. 2, 2020102 전남대학교에서 ‘자원처리기술 학술발표회’를 마치고, 백양사에서 좌부터 황기엽 교수, 이강문 교수, 필자, 권숙문 교수, 신방섭 교수 전남대학교에서 ‘한국자원리싸이클링학회’를 마치고 백양사에서(2002. 5. 24.)주암칼럼 103 자원리싸이클링 제 29 권 제 2 호 , 2020 필자 부부와 Prof. M.C.Fuerstenau 부부와 같이 South Dakota주 Rapid City를 떠나면서(1982. 11. 21.) 리싸이클링연구 日本파트너 外川健一 교수(앞줄 좌)의 대학원생과 함께(2000년) 뒷줄 좌부터 : 野見山, 藤本, 村上 제군주암칼럼 J. of Korean Inst. Resources Recycling Vol. 29, No. 2, 2020104 1993년 5월 27일, International Mineral Processing Congress(IMPC)에서 발표를 마치고, Sydney에서 송진곤(전 영풍광업 선광부장, 현 Univ. of New South Wales Scientist)씨와 함께 EARTH’93 각국대표(Seoul Swiss Grand Hotel, 1993. 10. 13.) 좌부터 Detchana Chutinara(태국), 原田種臣(日本), 張傳福(中國), 蔡敏行(臺灣), 吳在賢(韓國)주암칼럼 105 자원리싸이클링 제 29 권 제 2 호 , 2020 설악산에서 대학원생과 같이(1992. 8.) 1980년대의 필자 연구실 가족, 덕소에서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