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학회 소식 J. of Korean Inst. Resources Recycling Vol. 29, No. 2, 202086 한국자원리싸이클링학회 2019 년 대차대조표 자 산부 채 와 기 금 과 목 2018 년 금액 ( 원 ) 2019 년 금액 ( 원 ) 과 목 2018 년 금액 ( 원 ) 2019 년 금액 ( 원 ) Ⅰ. 유동자산 366,626,864395,824,444I. 고정부채 57,875,98061,264,575 1. 현금과예금 1) 2. 운영기금 2) 3. 주암상기금 6) 22,117,762 311,441,230 33,067,872 47,100,169 317,071,445 31,652,830 1. 비품잔존가 4) 2. 퇴직급여 충당금 1,626,800 56,249,180 918,600 60,345,975 Ⅱ. 투자자산 72,000,00072,000,000II. 일반기금 417,235,102421,450,275 1. 사무실임대 보증금 72,000,00072,000,0001. 운영기금 5) 2. 사무실 임대예치금 3. 특별기금 6) 312,167,230 72,000,000 33,067,872 317,797,445 72,000,000 31,652,830 Ⅲ. 기타자산 56,975,18061,071,975III. 이월금 8) 22,117,76247,100,169 1. 전화가설 예치금 3) 2. 퇴직급여 예치금 7) 726,000 56,249,180 726,000 60,345,975 1. 당기이월금 2. 2018 주암상 기금전입금 20,117,762 2,000,000 45,100,169 2,000,000 Ⅳ. 유형고정자산 1,626,800918,600 1. 비품구입가 4) ( 감가상각비 ) 4,431,000 (2,804,200) 3,541,000 (2,622,400) 자산총계 497,228,844529,815,019 부채와 기금 총계 497,228,844529,815,019 1) 일반예금 통장별 금액 ( 학회 일반 운영금 + 2020 년 주암상 기금전입금 ) 2) 운영기금 적립액 : 일반 운영기금 ( 하나대투증권 MMF+ 수협은행 정기예금 +KB 증권 CMA+ 농협예금 ) 3) 전화 2 대 , FAX 1 대의 예치금 각 242,000 원 4) 비품의 감가상각 내역 표 참조 (5 년 내구기간으로 잔존가 없이 균등율 감가상각 ) 5) 운영기금 예금가 (2) 와 전화가입권 (3) 6) 리싸이클링대상인 주암상기금 7) 퇴직급여 적립금 8) 총 당기 잉여금 ( 전기이월금 + 당기잉여 및 손실금 + 기금이자수입 ) 중 기금이자 전입 후 차기이월금학회 소식 87 자원리싸이클링 제 29 권 제 2 호 , 2020 감사보고서 2019 년 1 월 1 일부터 2019 년 12 월 31 일까지 제 27 회계기간의 사단법인 한국자원 리싸이클링학회 업무 및 회계 감사를 하였던 바 , 적법으로 처리되었음을 인정하 고 서명날인 함 . 2020 년 3 월 24 일 사단법인 한국자원리싸이클링학회 회원동정 【신입회원명단】 2020 년 2 월 21 일 부터 2020 년 4 월 20 일까지 입회하신 회원을 추가합니다 . 성명출신교 ․ 학위입회일자근 무 처 우편번호 비고 전화번호 최주 서울대 ( 학사 ) 서울대 ( 석사 ) 서울대 ( 박사 ) 2020. 4. 3. 포항공과대학교 철강대학원 교수 경북 포항시 남구 청암로 77 choijoo@postech.ac.kr 37673 054-279-9029 정 1082 【회원 및 회원사 정보변경】 특별회원사인 ( 주 ) 디에스프리텍이 인수합병을 통해 , ( 주 ) 티에스케이프리텍으로 사명 변경 . ( 주 ) 티에스케이프리텍 , 대표 오창택 , 정영철 , 충북 진천군 초평면 도장길 34-29 한국전자제품자원순환공제조합 연구개발팀 최원희 팀장에서 이충우 팀장으로 변경 . ≪ 회원들의 학위취득 , 직위 , 직장 및 주소변경 등에 대한 사항을 본 학회 사무국에 통보하여 주시면 본 난을 통하여 알려 드릴 예정이니 소식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학회 소식 J. of Korean Inst. Resources Recycling Vol. 29, No. 2, 202088 2020 년도 제 2 차 편집위원회 회의록 ( 제 13 대 편집위원회 제 8 차 회의 ) ○ 일 시 : 2020 년 4 월 3 일 ( 금 ) 17 시 -18 시 / 온라인회의 ○ 참석자 : 이재령 편집위원장 , 유경근 , 왕제필 , 정경우 편집간사 , 강정신 , 고명수 , 김관호 , 김영진 , 김진수 , 김현중 편집 위원 ≪ 심의안건 ≫ 심의안건 1. 학회지 제 29 권 2 호 발간 논의 -29 권 2 호에는 총설 1 편 , 연구논문 8 편 , 총 9 편의 원고를 게재하기로 함 . -2020 년 제 2 차 편집위원회 회의록 게재 -2019 년 학회 사업실적 및 결산보고서 게재 - 회원동정 및 주암칼럼 등 게재 심의안건 2. 학회지 논문 현황 검토 및 활성화 방안 논의 -2020 년 현재까지 총 8 편의 원고가 접수되었고 , 현재 논문은 총 4 편 심사 진행 중임 . - 현재 심사 중인 원고 4 편 중 , 3 편 EARTH2019 투고원고로 저자 수정사항이 많아 게재가 어려울 수 있으므로 , 1 편만 이 심사가 진행 중 . 2019 년에 투고된 EARTH2019 원고는 총 11 편이며 , 4 편은 게재확정 , 4 편은 게재불가 , 남은 3 편 은 현재 저자 최종 수정 중이나 수정사항이 많아 게재불가로 진행할 확률이 높은 상황임 . - 계명대 이상훈 교수님께서 2 편을 투고해 주시기로 하셨으나 , 현재 원고가 많이 부족 . -6 월호 발간을 위해서는 4 월 20 일 전까지 10 편 정도의 원고가 투고될 수 있도록 편집위원회에서 투고 독려에 노력하 기로 함 . - 한국연구재단의 2022 년 평가준비를 위해 게재불가율의 관리 필요 . 심의안건 3. 학술지 평가관련 윤리규정 개정의 건 -2020 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학술지평가와 관련해서 , ‘ 연구윤리규정 ’ 평가 가이드라인을 요구 . - 과총에서 연구윤리 규정 중 ‘ 자자됨 (Authorship)' 기준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여 , 학회 윤리규정에 포함하여 수정 하 기로 하고 , 수정된 규정은 29 권 2 호부터 게재하기로 함 . ○‘ 저자됨 (Authorship)’ 기준 : 아래 항목 모두 만족시 저자 , 한 가지라도 불만족시 기여자 -Substantial contributions to the conception or design of the work; or the acquisition, analysis, or interpretation of data for the work; AND -Drafting the work or revising it critically for important intellectual content; AND -Final approval of the version to be published; AND -Agreement to be accountable for all aspects of the work in ensuring that questions related to the accuracy or integrity of any part of the work are appropriately investigated and resolved ※ 위 4 가지 기준을 모두 명시해야 ‘ 저자됨 ’ 항목 인정 ( 출처 : ICMJE)학회 소식 89 자원리싸이클링 제 29 권 제 2 호 , 2020 영문 윤리규정 개정 전영문 윤리규정 개정 후 Article 4 (Scope of Research Misconduct) ④ Misattribution of author refers to the act of refusing to grant authorship to those who made academic or technological contributions related to research content and results, or the act of granting authorship to those who did not make academic or technological contributions by way of gratitude or of paying respect. Article 4 (Scope of Research Misconduct) ④ Misattribution of author refers to the act of refusing to grant authorship to those who made academic or technological contributions related to research content and results, or the act of granting authorship to those who did not make academic or technological contributions by way of gratitude or of paying respect. The authorship must meet the following four conditions; -Substantial contributions to the conception or design of the work; or the acquisition, analysis, or interpretation of data for the work; and -Drafting the work or revising it critically for important intellectual content; and -Final approval of the version to be published; and -Agreement to be accountable for all aspects of the work in ensuring that questions related to the accuracy or integrity of any part of the work are appropriately investigated and resolved. 국문 윤리규정 개정 전국문 윤리규정 개정 후 제3조(연구부정행위의 범위) 본 규정에서 제시하는 연구부 정행위 ( 이하 “ 부정행위 ” 라 한다 .) 는 연구 과제의 제안 , 수행 , 결과 보고 및 발표 등에서 행하여진 것에 대하여 다음의 각 호의 내용을 말한다 . 4. “ 부당한 논문저자 표기 ” 는 연구 내용 또는 결과에 대하 여 학술적 , 기술적 공헌 또는 기여를 한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논문 저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거나 , 학술적 , 기술적 공헌 또는 기여를 하지 않은 자에게 감사의 표시 또는 예우 등의 이유로 논문 저자 자격을 부여하는 행위 를 말한다 . 제3조(연구부정행위의 범위) 본 규정에서 제시하는 연구부 정행위 ( 이하 “ 부정행위 ” 라 한다 .) 는 연구 과제의 제안 , 수행 , 결과 보고 및 발표 등에서 행하여진 것에 대하여 다음의 각 호의 내용을 말한다 . 4. “ 부당한 논문저자 표기 ” 는 연구 내용 또는 결과에 대하 여 학술적 , 기술적 공헌 또는 기여를 한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논문 저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거나 , 학술적 , 기술적 공헌 또는 기여를 하지 않은 자에게 감사의 표시 또는 예우 등의 이유로 논문 저자 자격을 부여하는 행위 를 말한다 . 논문저자는 다음의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논 문저자 자격을 획득한 것으로 인정한다 . - 연구의 개념이나 설계 , 연구 데이터의 획득 , 분석 , 또 는 해석에 상당한 기여를 한 자 - 중요한 학술적 내용에 대해 초안 작업을 하거나 비판 적으로 수정을 가한 자 - 출판본 원고에 최종적으로 승인을 한 자 - 연구의 어떤 부분의 정확성 또는 진실성과 관련된 질 문이 적절히 조사되고 해결되도록 연구의 모든 측면 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에 동의하는 자학회 소식 J. of Korean Inst. Resources Recycling Vol. 29, No. 2, 202090 심의안건 4. 기타토의 (1) 2020 리싸이클링백서 목차 검토 및 의견요청 -4 월 7 일 경 준비위원회를 열고 , 2014 리싸이클링백서 목차를 검토 ․ 수정하여 2020 리싸이클링백서 목차를 확정 하기로 함 . - 편집위원회에서도 목차에 대한 검토 후 , 수정 및 추가 의견을 준비위원회에 제출예정 . (2) 전자저널 발간으로 학회지의 ‘ 학회소식 ’ 부분 편집 검토 -2020 년부터 학회지가 인쇄물이 아닌 전자저널로 바뀌었음 . - 저널사이트 (http://j-kirr.or.kr/) 에서는 투고된 모든 원고의 검색과 확인이 용이해졌으나 , 그간 학회지 뒤에 실리던 ‘ 리싸이클링 쉼터 ’ 부분의 학회 소식은 볼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개선 필요 . - 전자저널에 꼭 필요하지 않은 기사 ( 편집후기 등 ) 는 제외하기로 하고 , 논문 이외의 소식은 저널사이트가 아닌 학 회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제작을 서둘러 진행하기로 함 . -e-book 에 들어가는 내용들은 매 issue 마다 나오는 내용들이므로 Issue 선택해서 들어가면 나오는 화면 상단에 contents, cover image 와 더불어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하거나 , 해당 내용을 PDF 로 제작한 뒤에 저널 홈페이지에 배너나 링크를 추가하여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등을 검토하여 학회 소식부분에 대한 접근성 개선 방안을 마련하 기로 함 . - 현재 초기화면이 2 가지 옵션이 있는데 리스트 형식으로 나오는 방식이 훨씬 보기 편리함 ( 줄 3 개 ). 디폴트로 리스 트 방식이 좋을 것 같음 . - 가능하다면 기존 논문들도 동일 웹사이트에서 검색이 가능하면 훨씬 이용이 편리해 보임 . 작업에 들어가는 비용 에 대해 검토하고 논의하기로 함 . 회비 납부 안내 ▣ 항상 본 학회에 관심을 가져 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정회원, 준회원(학생회원) 중에 회비가 여러 해 미납된 회원께서는 2020년 6월 20일까지 회비를 꼭 납부해 주시기 바라며, 향후 년회비를 2년 이상 미납한 회원에게는 학회운영상 부득이 회지우송 및 기타 소식 관련 서비스도 중단할 것이오니 조속 히 회비를 납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납부일 : 2020년 6월 20일(학회지 29권 3호(2020년 6월호)부터 발송중지 예정) ▣ 납부방법 : 계좌이체 또는 지로입금(지로번호 7609637) 우리은행 : 1005 - 301 – 118587 예금주 : (사)한국자원리싸이클링학회 ▣ 연락처 : 한국자원리싸이클링학회 사무국 전화 : 02-3453-3541~2, 팩스 : 3453-3540, E-mail : kirr@kirr.or.kr, http://www.kirr.or.kr주암칼럼 91 자원리싸이클링 제 29 권 제 2 호 , 2020 ― 선광 ・ 제련을 거쳐 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 연세대학교 오재현 명예교수 ◎ 일본에서 선광공학 ( 選鑛工學 ) 과 인연을 맺어서 65 년 세월이 흘렀다 . 1955 년 4 월 홀연히 도쿄 ( 東京 ) 를 떠나 센다이 ( 仙台 ) 에 있는 도호쿠대학 ( 東北大學 ) 자원공학과의 연구생이 되어 , 선광공학연구실에 입문하였다 . 시모이자카준소 ( 下飯坂潤三 ) 조교수 밑에서 1 년간 호되게 훈련을 받았다 . 下飯坂 교수 ( 당시 조교수 ) 는 도쿄대학 화학과 출신으로 공과대학 출신에 비하여 화학적인 지식이 월등히 강하였다 . 이 러한 배경으로 부선방법의 개발과 신소재의 탐색에 독보적인 업적을 발표하였다 . 필자의 연세대학교 후반기 연구실명을 소재공학연구실로 바꾸고 , 대부분의 대학원생이 ‘ 페라이트자석 ’ 과 ‘ 자성유체 ’ 를 연구하여 , 전자산업에 진출하게 된 것은 下飯坂 교수의 조언과 시사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 아민아세테이트를 포수제를 사용해서 석영 (SiO 2 ) 의 부선특성을 연구하여 , 보고서를 제출하고 1956 년 3 월 센다이 ( 仙 台 ) 를 떠나 도쿄로 돌아왔다 . 이왕 연구할 바에야 대학원에 입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교 와세다대학 ( 早稻田大學 ) 대 학원에 입학하였다 . 와세다대학 4 학년 필수인 졸업논문연구는 지질 ・ 광상학 ( 地質 ・ 鑛床學 ) 연구실에 배속되어 「 가네우찌 광산 ( 鐘打鑛山 ) 의 지질 ・ 광상 」 연구를 택하였다 . 광산 필드조사 시 뱀이 무서워 대학 졸업 후 ‘ 지질 ’ 에서 ‘ 선광 ’ 쪽으로 방향 을 바꾸었다 . 대학원 석사 ( 수사 ) 과정 2 년간은 선광연구실 하라다 다네우미 ( 原田種臣 ) 교수 ( 당시 조수 ) 의 지도아래 즐거운 연구생활을 보냈다 . 原田種臣 교수는 日本에서 「 자원리싸이클링공학 」 을 제일 먼저 개척한 분으로 , 오늘날 EARTH( 동아 시아 자원리싸이클링 국제심포지엄 ) 는 原田 교수께서 창설하여 발족시킨 것이다 . 필자가 연세대학교를 퇴임 후 25 년간 자 원리싸이클링 기술개발에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은 原田 교수와의 교분과 격려가 있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 1987 년 7 월 , 과학기술처의 해외 단기 학술 연수 프로젝트에 의하여 필자가 1 개월 간 와세다대학 原田연구실에 가 있었 다 . 그때 , 原田 교수의 자택에 기숙하였다 . 무더운 여름철 1 개월간이라는 장기간 原田 교수 댁에서 침식을 같이하며 , 출퇴 근을 같이 하였다 . 아침 출근 시 교외선 혼잡에 시달리면서 ‘ 이것도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즐거워 ’ 라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씩 웃었다 . 밤에는 11 시 , 12 시가 가깝도록 맥주를 마시면서 부인과 셋이서 열띤 대화가 오가고 , 때로는 인생론에 열중하 였다 . 이때 우리들은 나이가 60 세 전후로 , 마치 20, 30 대와 같았다 . 4 년간의 대학 학부생활 , 2 년간의 연구생 생활 , 2 년간의 대학원 석사과정 , 이렇게 유학을 마무리하고 1958 년 3 월 일본 을 떠났다 . 그러나 평생 일본과의 인연은 이어지고 , 상기와 같은 두텁고 끈끈한 정과 신뢰를 구축하게 된 것은 일본유학의 또 하나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 ◎ 1950년대의 선광공학을 담당한 교수님들 1958 년 3 월에 귀국하여 4 월부터 인하공과대학 광산학과에서 봉직하기 시작하였다 . 손병찬 교수 ( 孫秉讚 , 1920 년생 ) 가 선광공학을 담당하고 있어 나는 광산보안학 , 광산설계 및 광물분석실험 등을 담당해야 했다 . 손병찬 교수는 경성광산전문 학교 ( 서울대 공대의 전신 ), 九州제국대학 채광야금학과를 졸업 후 대명광업 , 구봉광산 선광과장을 지내신 분으로 당시 자 타 공히 인정하는 우리나라 선광공학의 제 1 인자였다 . 나는 손 교수와 같이 화공관 2 층 교수실의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창 가에 나란히 책상을 두고 있었지만 , 선광공학 근처에는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었다 . 당시 우리나라에는 서울대학교 , 전북대학교 , 전남대학교 , 한양대학교 , 조선대학교 , 인하공과대학 , 청주대학교 등 7 개 대학교에 광산공학과 ( 자원공학과 ) 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선광공학 전공교수는 손병찬 교수와 전북대학교의 이강문 교수 ( 李康文 , 1916 년생 ), 두 분뿐이었다 . 서울대학교는 금속공학과 최호영 ( 崔浩英 ) 교수가 , 전남대학교는 이광문 교수가 , 한양주암칼럼 J. of Korean Inst. Resources Recycling Vol. 29, No. 2, 202092 대학교는 채광전공 교수인 주석복 ( 朱錫福 ) 교수가 , 청주대학교는 지질전공 교수인 신병우 ( 申炳雨 ) 교수가 선광공학을 담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 이강문 교수는 1941 년 관립 경성광산전문학교 채광학과를 졸업 후 곧바로 노량진에 소재한 조선총독부 산하기관인 연 료 ・ 선광연구소 ( 燃料 ・ 選鑛硏究所 ) 에 입소하여 선광연구를 시작하였다 . 8.15 해방 후에는 전북대학교로 옮기어 1982 년 2 월 정년퇴임까지 40 년간 , 선광을 연구하고 , 교육한 필자와는 한 바퀴 위인 우리나라 선광 1 세대의 원로 교수였다 . 전북대 학교 재직 중 6 개월 간 호주 멜버른대학에서 연구한 바 있고 , 전남대학교 광산학과 초창기 겸임교수로 선광공학을 강의하 셨다 . 이강문 교수 불멸의 업적은 1980 년 광물처리공학 ( 鑛物處理工學 ) 의 명저를 출판한 것이다 . 강의노트를 매년 다듬고 새 로운 것을 추가한 이 명저에는 문장 하나하나에 이 교수님의 정성과 얼이 담겨져 있다 . 그리고 내용과 표현에 숙고하고 고 민한 흔적이 뚜렷하다 . 이 명저가 출판되어 40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 많은 후학교수가 배출되어 활동하고 있으나 이강 문 교수의 ‘ 광물처리공학 ’ 을 능가한 책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 1950 년대는 6.25 동란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일대 시련기였다 . 폐허에서 대학의 모양새만 겨우 갖춰야 했던 시대라 대 학에서 연구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 강의 위주의 공과대학에 만족해야만 했다 . 참고적으로 1980 년대 선광공학 담 당교수로 기억나는 분을 다음에 적어 둔다 . ・ 서울대학교 : 김연식 ・ 전남대학교 : 신방섭 ・ 연세대학교 : 오재현 ・ 동아대학교 : 강헌찬 ・ 한양대학교 : 황기엽 ・ 조선대학교 : 한오형 ・ 인하대학교 : 조동성 , 박찬훈 ・ 청주대학교 : 장광택 ・ 전북대학교 : 윤평란 ・ 강원대학교 : 이재장 ◎ 1960년대의 선광 ・ 제련연구소(1) 1959 년 미국 Minnesota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형섭 ( 崔亨燮 ) 박사가 귀국하였고 , 또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 조 교였던 김연식 ( 金淵植 ) 선생도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 두 분 다 금속공학과 Cook 교수 밑에서 부유선광 (Flotation) 의 기초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 당시 Minnesota 대학에서는 Cook 교수 , Iwasaki 조교수 체제 아래 우수한 대학원 학생이 연구하 고 있어 , 미국에서 으뜸가는 연구업적을 계속 발표하고 있었다 . 특히 산화광물의 부선이론을 확립하는데 기여가 많았다 . 귀국 후 원자력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던 최형섭 박사가 1962 년 대한중석 , 대한철광 , 대한석탄공사 및 한국광업제련 , 소위 국영 광업 4 사의 지원을 얻어 ( 재 ) 금속 ・ 연료종합연구소를 설립하였다 . 통의동 ( 通義洞 ) 에 신축한 광업회관 3,4,5 층을 차지하였으며 , 규모는 적었으나 수준 높은 한국에서는 처음인 민간연구소였다 . 상근연구원 , 비상근연구원 , 대학원장학생을 합하여 50 여명이 선광연구실 , 제련연구실 , 화공연구실 , 연료연구실 및 화 학분석연구실로 배속되어 있었다 . 그러나 연구소 중심은 선광연구실과 제련연구실로 선광 및 제련연구소와 같은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 선광연구실에는 최형섭 박사 아래 , 김연식 , 오재현 , 황기엽 ( 상근 ) 연구원이 버티고 , 소위 선광 3 인방으로 최형섭학파의 중심 연구원으로 통하고 있었다 . 선광연구실의 대학원 장학생으로 한국남 ( 미국 South Dakota School of Mines & Technology 의 석학교수 ), 윤여환 ( 미국 Virginia Polytechnic Institute & State Univ. 의 교수 , 부총장 대우 ), ( 故 ) 백영현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 이동휘 (KIST 한 ・ 러센터장 ) 박사 등이 배출되었고 , ( 故 ) 한정인 연구원과 이옥규 기술인이 있었다 . 그리고 한때 촉탁으로 김주영 ( 후 , Canada Noranda 연구원 ) 과 유택수 기술사가 파견 근무하였다 . 제련연구실에는 윤동석 ( 尹東錫 ), 김재원 ( 金在元 ), 두 서울대 교수가 비상근책임연구원으로 , 고창식 ( 高昌植 ) 박사가 상 근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 윤동석 교수 아래 조정완 ( 趙正完 , 후 한양대 교수 ) 대학원 장학생이 금속학회지를 편집하 고 있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 당시 윤동석 교수는 대한금속학회 회장이었고 , 1963 년에 금속학회지 창간호가 발행되주암칼럼 93 자원리싸이클링 제 29 권 제 2 호 , 2020 었다 . 김재원 교수 아래에는 이동녕 ( 李東寧 , 후 서울대 교수 ), 이재영 ( 李在英 , 후 KAIST 교수 ) 대학원 장학생이 연구하고 있었다 . 고창식 박사는 대한중석에서 파견된 황용길 ( 黃龍吉 , 후 동아대 교수 ) 연구원과 , 한국광업제련에서 파견된 이정용 ( 李廷 龍 , 후 온산동제련 전무 ) 연구원과 같이 연구하고 있었다 . 고창식 박사는 필자와 와세다대학 동기동창으로 일본 東北大學 대학원 금속공학과에서 납정련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였다 . 그래서 필자는 대한중석 과제로 고박사와 같이 연구 하기도 하였다 . 황용길 교수는 대한중석 퇴직 후 동아대학교 금속공학과를 창설하였다 . 그 전에 경남 양산에 제강분진에 서 아연을 회수하는 공장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자원리싸이클링을 처음으로 시도한 선구자였다 . 1967 년 3 월 필자는 인하공과대학을 사임하고 , 금속 ・ 연료종합연구소 책임연구원 ( 선광연구실장 ) 으로 자리를 옮겼다 . 그리고 2 년 후 , 1969 년 3 월 연세대학교로 ,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 그 2 년간은 주로 대한중석의 부선공정개선에 매달렸 다 . 대한중석에서 김재순 , 김금봉 연구원이 파견되고 , 이동휘 , 한정인 연구원과 필자 5 명이 UNKRA 가 설립한 대전광물시 험소에서 2 회에 걸쳐 pilot 시험을 수행하였다 . 그리고 상동광업소에서 2 회에 걸쳐 현장시험을 수행하였다 . 연구자로서 매 우 귀중한 경험이었고 , 연구결과를 현장에 적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였다 . 시험결과의 해석에 있어서 회사와 의 갈등을 빚었다 . 그래서 연구소를 떠났다 . 1971 년 , 금속 ・ 연료종합연구소가 KIST 로 통합되었다 . 연구소의 선광연구실은 KIST 의 제련연구실에 몽땅 자리 잡았 다 . 실장 황기엽 , 연구원 이동휘 , 김주영 , 기술원 김형원 . 1973 년 김주영 연구원이 Canada 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그 자리에 오종기 박사가 자리 잡았다 . 체제가 바뀌는 탓으로 제련연구실이라는 이름은 없어졌지만 인맥은 이화영 박사로 계속 이어 지고 있다 . ◎ 1960년대의 선광 ・ 제련연구소(2) 한국지질자원연구원 (KIGAM) 의 광물자원연구본부 자원회수연구센터 및 자원활용연구센터의 원조는 1922 년 10 월 13 일 설립된 조선총독부 산하 ‘ 연료 ・ 선광연구소 ’ 와 1954 년 3 월 9 일 설치한 UN 산하 UNKRA ‘ 대전광물시험소 ’ 이다 . 이 두기관이 통합 , 분리를 거듭하여 오늘의 KIGAM 광물자원연구본부의 근간을 구축하였다 . 노량진에 설립된 ‘ 연료 ・ 선광연구소 ’ 에는 한국인 최호영 ( 경성고공 출신 ), 김성호 등이 근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 나 시기는 알 수 없다 . 전술한 이강문 교수가 1941 년부터 1945 년까지 근무했다 . ‘ 연료 ・ 선광연구소 ’ 는 1927 년부터 1943 년 까지 34 권의 「 선광 ・ 제련시험보고 」 를 발간하였다 . 대전광물시험소의 초창기 소장은 미국인 호스킨스 (CL, Hoskins) 씨였고 , 한국인은 광물감정 : 김원조 , 이언진 , 선광 : 노해룡 외 수명 , 분석 : 장원표 , 김영철 , 사무 : 한남석 제씨로 기록되 어 있다 . 필자가 대한중석과 공동으로 대전광물시험소에서 상동광산 회중석광의 어유 ( 魚油 ) 대체 부선 파이롯시험을 수행한 것은 1967 년 가을이었다 . 당시 대전광물시험소는 국립광업연구소 산하로 광산조사과 , 채광과 , 선광과 , 제련과 , 분석 및 사무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 1 회 파이롯트시험에 20 일이 소요되었으며 , 2 회 40 일간을 대전광물시험소에서 보냈다 . 당시 대전광물시험소 선광과장은 조명승 ( 曺明丞 ) 씨 , 제련과장은 김정국 ( 金政國 , 후에 고려대교수 , 캐나다 이민 ) 씨였다 . 선광 과에는 황선국 , 홍성웅 씨 등 여러분이 있었다 . 국립광업연구소 정인복 ( 鄭寅福 ) 소장은 중앙지질광물연구소 시절 선광 과장을 지내신 분으로 선광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매우 높았다 . 그래서 ‘ 선광시험연구보고 ’ 가 제 1 회 (1968)- 제 7 회 (1972) 발간되었다 . 한편 1968 년 10 월 29 일에는 정인복 소장과 선광과 ( 과장 조명승 ) 가 주동이 되어 ‘ 제 1 회 선광 ・ 제련 연구 세미나 ’ 가 개최 되었다 . 이 세미나는 1990 년 제 15 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 조명승 부장의 열의와 선광과 여러분의 노력으로 학계와 연구계 그리고 현장 산업계에서 많은 분이 참석하여 22 년이라는 장기간 세미나가 지속되었다 . 선광 , 제련에 종사하는 동 료들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이 모임에서 서로 친분을 두텁게 하였다 . 돌이켜 보니 이 시기처럼 결속 하여 즐겁게 선광 ・ 제련을 연구하고 발전시킨 일은 없었다 .주암칼럼 J. of Korean Inst. Resources Recycling Vol. 29, No. 2, 202094 1963 년에는 ‘ 대한금속학회지 ’ 가 창간되었고 , 1964 년에는 ‘ 대한광산학회지 ’ 가 창간되었다 . 이 창간호에 전남대학교의 故신방섭 ( 申芳燮 ) 선생의 형석 ( 螢石 ) 부선에 관한 논문이 게재된 것으로 기억된다 . 1960 년대에는 이렇게 연구 분위기가 , 연구 환경이 향상되었다 . 한국자원연구소 시대 (1991-2001), ‘ 선광 ・ 제련 연구 세미나 ’ 의 후속으로 1996 년 6 월 26 일 ‘ 제 1 회 자원재활용 Workshop’ 이 개최되었다 .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 ◎ 선광 ・ 제련의 현장을 찾아서(1) - 대한중석 상동광업소 1958 년 여름 방학 때 학생 현장실습지도의 명분으로 대한중석 상동광업소를 방문하였다 . 상동광산은 일제 강점기부터 개발한 광산으로 우리나라 금속광산의 대표로 , 규모가 큰 광산이고 수준 높은 회중석 (CaWO 4 ) 의 부선공장을 조업하고 있 었다 . 1962 년 필자가 ( 재 ) 금속 ・ 연료종합연구소의 비상근 연구원이 되자 , 오지 중의 오지인 상동광산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 회중석광의 부산물로 회수하는 휘창연광 + 휘수연광의 혼합정광으로부터 양자의 분리부선이 필자의 과제로 선정되었다 . 1958 년 당시 제련과에는 김성수 ( 金星秀 , 후 영남대학교 교수 ) 와 이응조 ( 李應祚 , 후 교려대학교 교수 ) 두 분이 있었던 것으 로 기억된다 . 이 혼합정광을 반사로에서 휘창연광 (Bi 2 S 3 ) 을 우선 산화 배소하여 부선에서 휘창연광을 억제하고 휘수연광 을 부유시키는 조업을 하고 있었다 . 하루 1,500 톤을 처리하는 회중석의 부선공장에는 도경 ( 都慶 ) 선광과장 아래 옥광호 ( 玉光鎬 ), 이종대 ( 李鍾大 ) 등 여러분이 있었고 , 선광연구실에는 김금봉 ( 金錦鳳 ) 연구원이 꾸준히 연구하고 있었다 . 1967 년 말과 1968 년 초 2 회에 걸친 상동광업소 어유 ( 魚油 ) 대체 부선 현장 시험 시는 이종대 선광과장 아래 인하공대 제자인 김석기 ( 金錫基 ) 사원과 송경호 ( 宋暻鎬 ) 사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 한편 , 선광연구를 위하여 1976 년에는 이무섭 ( 李 武燮 ) 사원을 1 년간 영국에 , 1978 년에는 윤철노 ( 尹哲老 ) 사원을 1 년간 일본 ( 東京大 ) 에 파견하였다 . 모두 우리나라 선광의 엘리트였다 . 1962 년 9 월에는 영등포 문래동에 넓은 땅 (27,413 평 ) 을 확보하고 제련소를 건설하여 상동 ( 上東 ) 의 제련과를 옮겨오고 휘창연정광을 헤로숍프로로 산화 배소하였다 . 서울제련소 초대소장 (1962.9-1964.9) 고창식 박사는 새로 도입한 헤로숍프로의 정상조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 이 휘창연정광은 산화배소 후 Zone melting 법으로 고순도 금속 창연으로 최 종 상품화되고 , 한때 대한중석의 인건비를 충당할 정도였다 . 제련소 일각에 연구실을 만들어 이원해 ( 李源海 , 후 한양대학교 교수 ), 민경록 ( 閔庚錄 , 후 뉴욕사무소 소장 ), 이상래 ( 李相 來 , 후 부산대학교 교수 ) 등 여러분이 Bi Zone melting 작업과 화학분석 연구를 하고 있었다 . 제련소는 1975 년 4 월에 본사 ( 전해 서울에서 이전 ) 가 있는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용계동으로 이전하였다 . 친분이 있는 다음과 같은 소장 재임 시에는 제 련소에 자주 왕래하였다 . 1 대고창식 ( 高昌植 )1962. 9. - 1964. 9. 5 대박종태 ( 朴鍾泰 )1968. 5. - 1968. 6( 후 , POSCO 사장 ) 7 대도경 ( 都慶 )1969. 3. - 1972. 4. 9 대민경록 ( 閔庚錄 )1972.12. - 1974. 8. 10 대옥광호 ( 玉光鎬 )1974. 8. - 1975. 3.( 후 , 호주이민 ) 민경화 ( 閔庚和 , 후 인하공전 학장 ) 계장은 1973.11.1. 발족한 합금철 (FeMo) 연구반 반장을 맡고 있었다 . 1972 년에는 이상래 연구원을 코롬보프랜으로 영국에 유학시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하였다 .주암칼럼 95 자원리싸이클링 제 29 권 제 2 호 , 2020 - 문경 시멘트공장 1959 년 여름 방학 때는 제비표 문경 시멘트공장을 방문하였다 . UNKRA 의 원조로 건설 (1957 년 준공 ) 된 이 공장은 보 기 드문 석회석 부선공장이었다 . CaCO 3 72% 품위의 석회석을 1,000 톤 / 일 부선 처리하여 CaCO 3 80% 로 높여 시멘트원료 로 사용하고 있었다 . 당시 한기성 ( 韓基成 , 후 인하대학교 교수 ) 사원이 안내한 것으로 기억된다 . 6.25 휴전 직후 UNKRA 는 우리나라 산업부흥을 위하여 충주 비료공장 , 인천 판유리공장 그리고 문경 시멘트공장을 건 설하였다 . 원료를 우리나라에서 조달할 수 있는 종목으로 한정하였다 . 그런데 , 석회석 품위가 낮은 문경에다가 왜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였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 하여튼 당시 상동광업소와 문경 시멘트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부선공장을 조업하고 있었다 . 이러한 인연으로 1961 년 인하공대 광산공학과 대학원 1 회로 입학한 조동성 ( 趙東星 , 후 인하대학교 교 수 ) 군의 지도교수를 맡아 , 석회석 부선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 당시 문경시멘트는 생산 규모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시멘트공장이었으나 , 조업수명은 길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 1960 년대 , 회중석 및 석회석이 나의 주 부선연구과제였으나 맥석으로 수반하는 방해석 , 형석 , 석영 등의 부선 특성 연 구도 동시에 수행하였다 . 즉 , 1960 년대는 비황화광물 ( 非黃化鑛物 ) 의 부선 연구시대라고 할 수 있다 . - 연화광업소(蓮花鑛業所) 1971 년 7 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영암선 ( 영주 → 철암 ) 기차를 타고 연화광업소와 석포제련소를 향하고 있었다 . 나를 안내 차 동행한 영풍광업의 안정진 ( 安貞震 ) 부사장과 마주앉아 영풍광업 ・ 부평광업소의 선광이야기를 나누었다 . 부평광업 소의 부선 ( 浮選 ) 광미 ( 鑛尾 ) 를 주안염전에 매립하고 있으나 , 이 광미에서 운모 ( 雲母 ) 와 철분만 제거하면 골재 ( 骨材 ) 로 이용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 이 이야기가 발전하여 연구계약을 체결하고 78 만원의 연구비도 수령하였다 . 영풍광업 ( 永豊鑛 業 ) 이 선광문제로 대학교수에게 처음 연구를 맡겼다 . 이 연구결과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이 일 이 계기가 되어 1990 년대 초까지 장장 20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영풍광업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 당시 영풍광업 연화광업소는 5 만톤 / 월 처리하는 규모로 우리나라 제일가는 납 ・ 아연광산으로 알려져 있었다 . 채광에서 는 총 길이 2,740m 의 벨트컨베이어를 설치해 지하 600m 에서 채굴이 가능하게 해 생산성을 높이고 있었고 , 선광에서는 높 은 납 ・ 아연광의 부선분리효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 그리고 사원을 일본 ・ 스웨덴 등으로 연수를 보내는 등 광산기술 선진화 교육에 힘을 쏟고 있었다 . 나는 대학원생 곽창섭 군 ( 후 인천대학교 교수 ) 과 같이 섬아연광석 (ZnS) 의 부선에 관한 기초적 연구부터 시작하였다 . 섬아연광의 부선특성 , 방연광의 부선특성 그리고 섬아연광과 방연광의 부선분리특성의 기초적인 실험결과를 들고 , 연화 광업소 회의실에서 선광장 사원에게 정기적으로 강의를 하였다 . 얼마 후에는 선광부 계장급이 2 명씩 교대로 연세대학교 내 연구실에 2 개월씩 파견되어 연수를 받게끔 되었다 . 당시 연화광업소 선광부에 근무한 사원은 다음과 같다 . 선광부장김형태 ( 金亨泰 ) 선광과장김영한 선광계장서경일 , 민병헌 , 임명열 , 안준범 , 이옥규 , 유흥규 전임 정광부장이진호 , 민재호 본사 선광부장송진곤 ( 宋鎭坤 , 호주 이민 ) 제 2 연화광업소 선광과장신희덕 연화광업소 선광공장은 세계적인 수준의 연 , 아연 때로는 동 , 연 , 아연 부선을 조업하고 있었다 . 초창기 (1965 년경 ) 이 부선 조업을 개발하고 안정화시킨 이진호 선광부장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 1980 년대는 부평광업소의 일각에 본사 직속 의 연구실을 설치하여 선광연구를 하고 있었다 . 나는 1 주일에 하루를 이 연구실에 출근하여 자문을 하였다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