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특별기고 78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그리고 종합적으로는 Digital Culture의 중요성, 즉 구성원들로 하여금 digital 문화의 조성을 유도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보고서를 읽고 나서 타 산업군은 이미 힘든 과정을 한 번 겪고, 반성을 숨김없이 공유하고, 재출발하는 단계라는 것을 알고 나니 필자만 힘든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타 산업군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는 방식의 디지털적 변화’라는 주제로 최근 국내 건설산업이 활발한 적용 및 성과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현재 의 모습은 마치 2012년의 보고서에 조사된 결과와 마찬가지인 듯 느껴진다. 다만 아직은 DT관련 담당자들의 힘겨운 노력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실제 업무에 깊이 관여되어 가치를 창출하는 단계에 다다르진 않은 듯하다. 남이 한 실수 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가장 Classic하고 Analogue적이며 운영 하나 하나가 Massive, Unique, Rough한 건설 산업에 digital 문화를 조성해야 하는 고민도 함께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6. 제 언 본 제언은 당사가 소속된 그룹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주최하는 DT 포럼에서 발표되었던 내용으로 DT 관심자로서 공감하는 바가 많아 정리하였다. 1. DT는 목표가 아닌 수단이며 과정이다. DT관련 업무를 수행하면서 종종 언제 완료되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많다. DT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원하는 비즈니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고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 단위 기술별 마일스톤은 있겠지만 완료는 아 니다. 완료는 없다. DT의 본질은 끊임없이 전환과 개선, 융합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2. 기술적 과시에 굳이 집착하지 말자 DT관련 기술은 그 결과물 측면에서 시각적으로 화려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회사적으로나 홍보의 수단으로 적격이다. 다만 최신기술에 뒤쳐지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노력은 최대한 지양해야 한다. 대외적인 홍 보는 피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대내적으로는 솔직해져야 할 필요는 있다. 3. 고통이 심하지 않다면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생각/경험이 모인 조직의 전환수준의 변화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 어느 날 순탄히 잘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되물어봐야 한다. 충분히 실패하고 있지 않다면 리스크 테이킹을 최소화 하는 방식으로 진행 되거나 보고되고 있을 확률이 높다. 4. DT는 반드시 CEO의 어젠더/KPI가 되어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DT는 IT나 기술에 국한된 어젠더가 아니고, 일하는 방식/문화/사람/조직구조의 변화가 얽혀있 는 문제이다. 사내에 이런 각종 변화의 주도권을 갖는 사람은 오직 CEO 뿐이다. 해외 역시 개발 및 성숙 단계에 다다른 실제 많은 회사들이 CEO가 직접 DT를 추진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은 그림 5의 조사결과로 알 수 있다.Vol. 21, No. 4 79 4차 산업혁명 기술 활성화를 위한 Digital 문화 조성 <그림 5> DT의 도입/개발/성숙단계 회사 별 사내 DT담당 조직 조사결과(MIT Sloan) 7. 결 론 건설 산업의 생산성 저하는 이미 많은 자료를 통해 인용되어 왔기 때문에 익히들 알고 있다. 심지어 농업마저 건설 산업을 추월하는 실정이다. 그림 6의 일본 총무성의 조사 결과는 전 산업 대비 건설업의 연령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 한지 보여준다. 초고령화 국가인 일본보다 조금은 낫겠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국내 사정은 일본과 다르지 않다. 낮은 생산성과 변화에 둔감하고 전통적인 일하는 방식만 고집하면서 젊은 피를 수여받지 못한다는 것은 건설산업의 미래를 위해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꾸준한 변화를 추진한다면 급속한 발전의 가능성도 많다는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으므로, 과감하면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디지털 문화를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제가 Digital Transformation이라는 완료적 용어보다 Google의 연관 검색어로 보여지는 Digital Transformation Journey라는 진행적 용어를 더 선호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림 6> 산업별 취업자의 고령화 추세(총무성, 일본) [본 기사는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한국터널지하공간학회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특별기고 80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중국법 1. 서 론 학부생 시절, 토목공학을 전공하였고, 중어중문학을 복수전공 하였습니다. 복수전공을 하면서 3학년 2학기부터는 토목공학과 과목을 수강하지 못해서 공학적 지식이 심도있게 형성하지 못한 점이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그러나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토목공학을 심화적으로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중어중문학과 수 업을 들으면서 중국 어학, 중국 문학, 중국 역사나 풍습 등을 개괄적으로나마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학부생 시절 공모전 당선, 봉사활동 등으로 중국을 3차례나 다녀왔고, 국내에서 진행된 국제행사에서도 중국인들을 상대로 행사진행 봉사등을 하였습니다. 동기나 선후배들이 왜 이리 중국에 빠져있냐며 토목공학 공부나 하라고 했지만, 좋아 하는 일을 말리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후 졸업이후 직장생활을 할때도 출퇴근길에 듣는 mp3에는 중국노래나 중국 어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중국사랑은 변호사가 되어도 계속됩니다. 얼마 전 대한변호사협회와 한중법학회 공동주최로 제1회 중국법 아카데미가 개설되었습니다. 총 8회차 과정으로 개설이 되었는데, 지난 9월에서 10월까지 퇴근 후에 강원도 춘천에서 총 8번을 상경하며 강의를 수강하였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들은 강의를 혼자 묵히기 아까워 터널학회 회원분들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2. 중국의 헌법 중국의 근현대사는 1949년 6법전서를 폐지, 1957년 반우경화운동, 1966년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며 많은 혼란을 겪 어왔습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만큼 헌법이 총 4차례 제정되고, 5차례 개정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헌법이 9차례 개 강대규 변호사(토목공학 전공)Vol. 21, No. 4 81 중국법 정되었을 뿐 제정은 1948. 7. 17. 최초의 제정밖에 없습니다. 그에 반해 중국은 4차례(1954.9. 최초헌법 160조문, 1975.1. 문화대학명시기 30조문, 1978. 3. 문화대혁명 후 60조문, 1982. 12. 현행헌법, 138조문)나 제정이 되었으니 넓 은 토지와 폭발적인 인구수만큼 많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1982. 12. 현행헌법을 제정한 이후에도 5차례의 개정을 하였는데, 1988. 4.에는 사영경제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 였고, 1993. 3.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실행하였습니다. 2004. 3.에 이르러서는 사유재산 불침범 원칙을 확립하고 국가는 인원을 존중하고 보장하는 헌법으로 개정하였습니다. 중국의 헌법은 전국인민대표회의(全国人民代表大会)에서 제‧ 개정을 하는데,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이자 입법부, 행 정부 역할을 수행하고, 집행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매년 3월 5일에 개최되는데, 2,800여명이 소속되어있는 기구입니다. 3. 중국에도 소유권이 있을까요? 정답 : 중국에도 소유권은 존재합니다. 다만 누가 소유하는지가 문제이지요. 중국 물권법 제2편1)은 소유권을 규정하고 있고, 그중 제5장은 ‘국가소유권‧ 집단소유권‧ 사인소유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위 세 소유권의 차이는 전적으로 소유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재산의 종류에 있습니다. 가령 도시부의 토지 는 국가에 귀속되고, 농촌부의 소유권은 농민집단의 소유에 속하며, 사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는 없고, 동산이나 저축‧ 투자 및 그 수익 등을 소유할 수있습니다. 세 가지 소유권에 속하지 않은 기업출자에 대한 권리관계나, 법인의 소유 권, 사회단체의 소유권 등은 마지막 장에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가소유권의 권리주체는 국민전체이며, 국무원이 국가를 대표하여 소유권을 행사합니다. 도시의 토지 이외에도 광 물,하천, 해역, 무선전파수대역자원등은 국가의 소유입니다. 집단소유권의 권리주체는 구성원 전체이고, 중대한 사항은 구성원 전체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집단에 소유한 토지, 산림, 생산설비, 배수설비, 체육시설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집단의 구성원을 어떻게 확정하는 규정이 명확하게 없 고, 이혼한 경우에 취급이나, 개개농민의 지분의 양도가능성 등 불명확한 점이 많고, 국가로부터 수용되는 경우를 제 외하고는 다른 곳에 처분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른바 ‘처분권이 없는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인소유권의 객체는 합법적인 수입이나 건물, 생활용품, 원료 등 부동산‧ 동산이고 그 이외에 경제활동의 결과인 투자수익 등입니다. 그러나 ‘사인’이 정확히 어떠한 주체를 포함하는지 등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제3편에는 용익물권을 규정하고 있는데, 국가소유의 토지는 건설용지사용권, 집체소유의 토지는 토지도급경영권을 용익물권으로 하여 사용수익하고 있습니다. 1) 법률의 체계는 편, 장, 절, 관, 조, 항, 호, 목 등으로 구분되어있습니다.특별기고 82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4. 중국의 소송실무 우리나라는 사법부가 입법부와 행정부가 동등한 삼권분립이지만, 중국은 사법기관이 독립이 되어 있지 않고, 입법 권의 하위기관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법원에 소제기를 하면 접수가 되어 소송절차가 곧바로 진행이 되지만, 중국은 ‘입안’이라는 과정을 거 쳐야합니다. 접수와 소송진행사이에 ‘입안’이라는 단계가 있어서 접수를 하고도 ‘입안’이 되지 않으면 소송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중국 재판부는 우리나라와 달리 하루에 한 사건정도만 재판을 합니다. 재판을 종일 진행하므로, 미리 증거자료가 모두 제출되어야 하고, 소장 및 답변서 등을 구술로 전부 진술해야 합니다. 5. 결 론 유사이전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현재에도 상호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중국의 법과 제도 는 이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중국 현행법이 제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법령이 미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오히려 채무자들을 신상공개하거나 출국금지하게 하는 조항이 있거나, 우리나라는 취업규칙을 배치해야 하는 것에 비해 중국은 근로자가 취업규칙의 낱장에 대해 일일이 읽어보고 서명해야 하는 등의 급진적인 조항들이 눈에 띕니다. 유치권에 대해서도 경매를 통해서 바로 해결을 할 수 있도록 하여 건설대금에 대한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려는 움직 임도 보입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오해로 중국의 법과 제도를 배척하지 말고, 우리나라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적극 적으로 도입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 기사는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한국터널지하공간학회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Vol. 21, No. 4 83 흥미로 시작한 첫걸음, 지금의 나를 만들기까지 흥미로 시작한 첫걸음, 지금의 나를 만들기까지 <그림 1> TBM을 이용한 서울~강릉 KTX 터널 건설현장<그림 2> 동해선 포항~삼척 철도건설 제 8공구 건설현장 학부생 4학년 당시 현재 지도교수이신 반호기 교수님께서 강원대학교 토목공학과로 부임하셨다. 막연히 취업을 생 각하던 나에게 교수님의 수업은 새로운 것을 배움에 대한 흥미를 만들어주셨으며, 그 계기로 석사과정을 진학하게 되 었다. 석사과정 진학과 동시에 학부생 때 배우지 못하였던 연구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벌써 박사과정 5학기 가 지나가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된 대학원생 생활은 연구에 대한 성과가 나올 때마다 성취감을 느끼게 하였으 며, 나를 한층 더 성숙시켰다. 교수님께서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배우는 것은 그 이상이라고 하시면서 현장에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항상 같이 가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셨다. TBM을 이용한 서울~강릉 KTX 터널 건설현장, 동해선 포항~삼척 철도건설 제 8공구 건설현장 등의 현장견학은 이론으로만 공부를 하였던 내용을 실제 현장을 접하면서 더욱 쉽게 이해되었다(그림 1-2). 김희수 강원대학교 건설융합공학부 토목공학전공 박사과정84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학생기고 여태까지 진행하였던 연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연구는 석사학위논문으로 작성하였던 겨울철 터널 입출구 도로 면 결빙방지기술 개발 연구가 아닐까 싶다(그림 3). 결빙방지기술 개발 연구는 처음으로 머릿속으로 구상한 아이디어 를 실내실험과 현장시험으로 진행한 첫 번째 연구이며, 강원도 지반공학 석, 박사모임이라는 인연을 만들어준 고마운 연구였다. 하지만 터널 입출구에 설치하기 위한 폐터널 조사를 하였으며, 강원도부터 경상도, 충청도까지 많은 지역을 조사하였다. 또한 현장시험 시 온도가 낮아야 하는 탓에 겨울철 저녁부터 새벽에만 시험을 진행하여 고생을 많이 시 켜준 연구이기도 하다. 단순히 흥미로 시작했던 대학원생활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또한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신 교수님들과 선, 후배 들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 앞에 ‘떳떳한 박사’가 되고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배’가 될 수 있도록 지금보다 더 최선을 다할 것이다(그림 4). <그림 3> 터널 입출구 도로면 결빙방지기술 현장시험장<그림 4> 강원대학교 지반공학연구실Vol. 21, No. 4 85 데린쿠유, 지하도시의 고난한 삶 현대의 터널과 지하공간은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생존을 위해서 지어졌다. 첨단 장비를 갖춘 지금도 그 작업은 힘들고 위험하지만 그들은 거의 맨손으로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땅을 파내려갔다. 종교박해가 극에 달했던 데시우스 황제 시절 일곱 명의 젊은이가 동굴 로 들어갔다. 그들은 잠에 들어 187년간이나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445 년, 마침내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 뀌어 있었다. 그들이 빵을 사려고 내민 동전은 이미 통화가치를 잃어버렸 고 로마는 전염병과 이민족 침입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더 이상 누구 도 종교 때문에 핍박을 받는 일은 없었다. 이 일화는 동굴에 묻혔다가 살 아난 예수와 함께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증거로 자주 인용하는 사례다. 당 시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187년이나 살아왔다는 게 도저히 믿겨 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동굴 속에서 잠들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 게 아닐까. 어쨌든 종교탄압과 동굴의 삶은 보르헤스가 쓴 ‘아베로에스의 추적’을 비롯하여 많은 작가의 상상력을 자 극하는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깨어 있었다. 깨어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결혼과 출산 등 인간의 삶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정기적인 집 회와 세례 교육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굴은 단순한 피신처가 아니라 주 데린쿠유, 지하도시의 고난한 삶 데린쿠유 내려가는 계단 김재성 (주)동명기술공단 부사장인문학 산책 86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거의 기능을 모두 갖춘 하나의 도시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전쟁이나 재해를 피해 얼마간 동굴에 숨어살 수는 있다. 그러나 SF도 아니고 어떻게 수천명이 도시를 이루며 동굴 속에서 살 수 있었을까. 지하도시의 배경과 규모 데린쿠유(Derinkuyu)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이다. 카파 도키아에서 가장 큰 지하도시인 이곳은 1960년 닭을 쫓던 농부가 우연히 발견하였다. 이후 비슷한 지하도시가 계속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무려 40여개나 된다. 데린쿠유는 깊 이 55m 20층의 주거공간까지 조사되었으며 깊은 곳까지 맑은 공기가 닿을 수 있게 40m 깊이로 환기구를 만들어 놓 았다. 시설규모로 보아 약 8천명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보 인다. 왜 이렇게 많은 지하도시가 만들어졌을까. 자연환경 과 외부침략이라는 두 요인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카 파도키아 일대는 여러 암층이 얽혀 있고 또 파내기는 쉽지 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굳어져가는 응회암 지층이 많다. 이것이 자연적인 이유라면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와 같은 거대세력이 휩쓸고 간 광풍의 역사는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자연조건은 선사시대부터 계속된 화산활동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카파도키아에는 대규모 기암지대가 많은데 이는 에르시에스(Erciyes)산의 분출 때문이다. 용암과 화산재 충적층은 적갈색 흰색 주황색 등 서로 다른 지층을 만든다. 이러한 지층변화는 지하공간을 만들 때 아주 유리하다. 예를 들어 응회암층을 파내면 그 위쪽의 단단한 용암층이 자 연스럽게 지붕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현재 터키가 이스탄불은 유럽에 나머지는 아시아에 걸쳐있는 것처럼 카파도키 아도 과거에는 유럽과 아시아 틈에 끼어 있었다. 이곳은 주요한 고대 통상로로 BC 3세기경에는 아바노스(Avanos) 위 르굽(Urgup) 등 여러 왕국이 자리 잡은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때문에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 등 거대세력의 패권이 바뀔 때마다 온 몸으로 전쟁의 광풍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카파도키아 일대에 흩어져 있는 동굴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데린쿠유처럼 평지에서 아래로 파내려 간 지하도시, 바위산을 옆에서 뚫어 만든 괴레매 동굴주거지, 깍아지른 절벽 중간에 지은 동굴교회 등. 이러한 동굴이 상당 부분 침략과 도피의 산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굴 속에서 선사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 아 인간이 처음 여기에 살기 시작한 것은 수렵 채취기인 4000년 이전으로 보인다. 데린쿠유에서는 흰 대리석으로 만 든 독수리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BC.18세기 이 지역을 지배하던 히타이트의 유물이다. BC.401년 크세노폰이 쓴 아 에르시에스산Vol. 21, No. 4 87 데린쿠유, 지하도시의 고난한 삶 나바시스(Anabasis)에는 프리기아인이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프리기아인은 히타이트와 비슷한 시기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다. 누가 만들었든 오랜 세월동안 조금 씩 확장되었기 때문에 어떤 한 시기의 유물로 보는 것은 마땅치 않다. 응회암은 석기나 뼈조각 등 단순한 도구로도 쉽게 파낼 수 있다. 그래서 추위와 맹수를 피하기 위한 동굴이 선사 시대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지평면 근처에 작 은 동굴이 만들어졌겠지만 이후 광야로 쫓겨온 기독교인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최종 완성된 규모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처음에는 독립적으로 만들 어졌지만 점차 연결통로를 확장하여 주변에 있는 지하도시 와 소통하기도 했다. 변변한 측량도구도 없던 시절 도시간 연결통로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사막의 지하수로를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두 개의 수직갱을 이용했을 것이다. 두 도시 끝에 수직굴을 파고 땅위에서 마주 보도록 막대를 놓는다. 그리고 수직굴 아래도 같은 방향으로 막대를 놓고 뚫어 나가면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하도시 곳곳에 있는 수직갱은 환기와 햇빛을 받아들이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지하도시간 연결 작업에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지하도시의 삶 지하도시에는 지상에서 필요한 시설이 거의 그대로 옮 겨져 있다. 방이나 부엌 외양간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공 간은 물론 학교나 세례 제의를 위한 집회시설, 곡식이나 포도주를 저장하기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법 을 어긴 죄수나 격리가 필요한 사람을 가두어 놓은 흔적도 있어 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이외에도 생 명유지에 꼭 필요한 물저장소, 환기시설, 매장공간도 보인 다. 외부침입에 대비해서 통로 중간에는 비상 차단용 돌을 데린쿠유 지하도시 수직갱 외부침입 방지돌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