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인문학 산책 78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남미 고대 거석문명의 미스터리 삭사이와망의 정교하게 짜 맞추어진 절석으로 이루어진 성벽 경이로운 안데스의 거석 유적들 메조아메리카나 남미 고대 문명들을 통 털어 거석 건축 이 행해진 곳은 이상하게도 안데스 중앙 산지에 국한되어 있다. 거대 절석을 사용한 토목건축수준은 구대륙 고대문 명 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구대륙의 경우 절석들의 이동경로가 대체로 평탄하거나 고대 이집트의 경 우처럼 수운이 가능했다. 하지만 안데스의 경우 해발 4000 미터나 되는 산악 지역이어서 가파른 경로로의 운반이 불 가피했다.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교외 산 위에는 삭사이와 망Sacsayhuaman이라는 성채 유적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크고 작은 수 만 개의 절석이 정교하게 쌓여있다. 1553년 삭사이와망을 처음 방문한 스페인 역사가 페드로 시에자 드 레온Pedro Cieza de Le n도 이와 비슷한 찬사를 했다. “이 벽들을 구성하는 석재들이 너무나도 크고 장엄해서 도대체 그것들을 어떻게 거기에 운반해 짜 맞추었으며 그 리고 어떻게 다듬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당시 이를 위해 사용했을 도구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이들 중 일부는 그 폭이 4미터에 달하며 높이도 7미터나 된다. 다른 것들도 최소한 황소 크기만큼 된다. 그리고 얼마나 정 교하게 짜 맞추었는지 틈새로 동전조차 끼워 넣을 수 없을 정도다.” 맹성렬 우석대학교 교수Vol. 21, No. 3 79 남미 고대 거석문명의 미스터리 올란타이탐보의 안산암 거대 절석들로 짜맞춰 세워진 석벽 1590년에 이곳을 방문한 예수회 신부 호세 데 아코스타J se de Acosta도 다음과 같은 경탄의 글을 남겼다.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 이렇게 거대한 석재들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믿기 어려울 것이다.---무엇보 다도 경탄할만한 사실은 이 석재들이 크기나 모양이 불규칙하다는데 있다. 이런 석재들을 모르타르 사용 없이 놀랄 만큼 정확히 맞추어져 있다. 대부분이 크기가 다르고 모양도 달라 무수히 반복적으로 맞춰보는 작업을 했을 것이 틀 림없을 것이므로 이 모든 것들을 완성하는데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엄청난 고생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의 눈에 경이롭게 비친 석벽들은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에 익숙한 이들의 눈에도 여 전히 경이롭다. 우선 그 돌들의 크기를 생각해보자. 성곽은 대체로 30톤 급 절석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군데군데 250 톤 이상 되는 것들도 존재한다. 이 절석들이 채석된 장소로 가장 가까운 후보지를 택해도 몇 굽이의 골짜기를 건너 32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도대체 그 멀고 굴곡이 심한 경로로 어떻게 그런 무거운 절석들을 운반한 것일까? 두 번째 로 놀라운 사실은 그 절석들이 매우 정교하게 짜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쇠보다 단단한 돌들을 마치 칼로 버터를 자르듯 자유자재로 다듬어 동전 뿐 아니라 어떤 것들은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 교하게 맞추었다. 쿠스코에서 8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올란타이탐보 Ollantaytambo에는 150톤 가량의 안산암 절석 6개가 얇은 절석들과 교차로 짜 맞추어져 세워진 거대한 석 벽이 있다. 이 석벽들도 역시 종잇장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완벽하게 되어있다. 정교한 축성은 다분히 그 지 역에 잦은 지진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 제로 스페인 정복기에 있었던 지진들에 의해 스페인인 들이 지은 건축물이 대부분 폐허가 되었음에도 삭사이 와망과 올란타이탐보의 석벽은 오늘날까지 건재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작업이 가능했을까? 초정밀 거석 건축에 대한 가설 오늘날 주류 학계에선 삭사이와망의 성곽과 올란타이탐보의 석벽이 당연히 모두 잉카 제국 시절에 건축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정복 초기 처음 이 장관을 목도한 스페인인들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페인 정복자와 잉카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16세기의 페루 연대기 학자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Garcilaso de la Vega는 삭사이와망 석벽을 처음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뛰어넘는 불가사의함을 그 유 적이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것이 잉카인들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그는 다음과 같은 기 록을 남겼다.인문학 산책 80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석재 가공과 운반을 위한 도구나 기관이나 또는 기구에 대해 무지한 잉카인들이 거대한 바위를 자르고, 다듬고, 들어 올려서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성곽을 쌓았으며, 그것도 엄청난 정밀함으로 짜맞추어냈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 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악마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있는 잉카인들은 그것이 악마의 마법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믿고 있다.” 잉카인들도 자신들의 선조가 그것을 건설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럼 도대체 누가 건설했단 말인가? 누구였던 간에 이런 거석들을 자연 상태 그대로의 울퉁불퉁하고 급경사진 산꼭대기까지 운반하는 것은 엄청난 난제였 을 것이다. 따라서 아마도 실험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듯 채석지에서 돌을 운반하기 위해 특별한 진입로와 경사로가 만 들어졌을지 모른다.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주립대 건축학과 교수 쟝-피에르 프로첸Jean-Pierre Protzen은 많 은 돌들이 자갈이 깔린 길 위에서 미끄러져 운반되었고, 이로 인해 절석 표면이 매끄럽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초정밀 거석 건축방법이 밝혀지다!? 프로첸의 주장은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그리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는 그 험한 경사지들을 거쳐서 운 반해온다는 것이 녹록치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프로첸의 안데스 고대 유적 조사에 동행해서 그와 여러 문제를 의 논했던 동료 교수인 매리 코메리오Mary C. Comerio는 그래서 라마와 같은 짐승들 기름을 윤활유로 사용해 절석이 미끄러지도록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이야트 베릴은 A. Hyatt Verrill은 단단한 안산암을 돌망치나 청동기로 다듬었을 것이라는 고고학자들이나 과학 자들의 추측은 터무니없으며,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로첸은 이런 거석 가공도 크고 작은 돌 망치만을 사용하는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시행착오를 반복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1986년 2월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지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돌로 만든 도구를 사용해서 안산암을 가공하는 것이 가능함을 구현해 보였다. 그런 가공에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필요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잉카인들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시 간이나 효율성이란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삭사이와망이나 올란타이탐보의 유적들과 같은 것들을 만들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이런 것들이 모두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시행착오를 거듭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프로첸 가설의 문제점 프로첸의 이론은 석재 가공의 실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바라볼 때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그의 방법대로 거석을 가공하려면, 가공된 아래쪽 거석과 위쪽 거석이 잘 들어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거석을 들어 올렸다 내렸 다하면서 서로 접하는 부분을 가공해야 한다. 아마도 어림잡아 수천 번 반복해야 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100톤이 넘는 돌을 다루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또, 그런 식으로 해서 윗돌을 아랫돌에 면도날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Vol. 21, No. 3 81 남미 고대 거석문명의 미스터리 정확히 짜 맞추기도 쉽지 않다. 프로첸이 보여준 것과 같은 단지 작은 돌들을 가공해서 서로 짜 맞추는 방식으로는 이런 실제적인 난관에 대한 해법을 제대로 제시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방법상의 난제를 극복하려면, 결국 처음부터 어떤 설계도가 존재해서 여기에 맞추어 오차가 거의 없도록 초정밀 가공을 한 후 그대로 짜 맞추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짜 맞춘 돌들이 단순한 직육면체라 면 이런 작업이 비교적 용이할 것이다. 하지만 내진성耐震性을 높이기 위해 실제의 돌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형태로 만들어져 이를 사전에 설계해서 그 설계대로 정확히 가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석재 가공 측면에서 프로 첸은 처음부터 서로 비슷한 각도로 맞는 암석들을 찾아서 가공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잉카인들이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말이 쉽지 그런 작업 또한 그리 용이한 것은 아니다. 티와나쿠의 영향 삭사이와망이나 올란타이탐보에 구현된 석재가공 및 건축기술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 기원은 어디일까? 가장 유력한 후보로 티와나쿠가 꼽힌다. 그곳에서 개발된 기술들이 나중에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1860년대에 페루에 미국 판무관commisioner으로 파견되어 잉카 유적지를 답사했던 고고학자 에프라임 G. 스퀴어 Ephraim G. Squier는 티와나쿠 아카파나 피라미드 석축기술이 쿠스코 삭사이와망 석벽 건축과 관련있다고 주장했다. 1880년대에 안데스 답사를 한 독일 고고학자 알폰스 스튀벨Alphons St bel과 막스 울레Max Uhle는 올란타이탐보가 티와나쿠의 영향을 받았다고 결론내렸다. 그들은 수직으로 서있는 올란타이탐보의 거석 돌기둥이 티와나쿠의 거석 돌 기둥과 유사한 점을 확인했는데 특히 양쪽 모두 석재들이 90도로 가공된 것에 주목했다. 1930년대 말 안데스 탐사작 업에 참여한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우벨로데-도에링Heinrich Ubbelohde-Doering은 올란타이탐보의 태양신전 Temple of Sun과 티와나쿠의 푸마푼쿠 신전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특히 두 건축물에서 T자형의 죔쇠구멍cramp sockets, 날카롭고 일직선인 모서리, 그리고 석재들 각도의 완벽함 등을 들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1) 1900년대 초반부터 50여 년간 티와나쿠를 조사한 오스트리아 출신 사업가아두르 포스난스키는 이런 건축적 완성 도 측면 뿐 아니라 특별한 양식에 대해 주목했다. 그는 올란타이탐보 거석에 새겨진 계단형 부조가 티와나쿠의 특징 적인 상징 장치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계단 상징이 티와나쿠에서 남미 각지로 퍼져나갔다고 주장했다.2) 안산암을 초정밀 가공하다. 삭사이와망이나 올란타이탐보에는 석벽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안산암 바위에 계단을 만든 것이나 모서리가 예각이나 직각이 되도록 통째로 가공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계단이나 입방체들은 현대 건축에서 보는 1) Jean-Pierre Protzen & Stella Nair, Stones of Tiahuanaco: A Study of Architecture and Construction, The Cotsen Institute of Archaeology Press, 2013, pp.XII-XIV. 2) 그레이험 핸콕, 신의 거울, 김영사, 2000, pp.369-370. 인문학 산책 82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것과 흡사할 정도로 초정밀 가공이 되어있다. 위의 사진들은 삭사이와망의 ‘수추나 천문대Suchuna observatory’에 있는 계단을 찍은 것이다. 여기서 보듯 계단의 가공이 매우 정밀하게 되어있다. 프로첸 말대로 석벽에 사용된 돌들의 가공은 처음부터 서로 아귀가 잘 맞는 것들을 골라서 했다손 치더라도 암반에 낸 계단은 모스 경도 6-7정도나 되는 상당한 양의 안산암을 쪼아냈어야 하는데 이런 작업 또한 돌망치로 했단 말인가? 아래 사진은 올란타이탐보에 있는 입방체로 가공된 석재들이다. 석벽에 사용된 돌들은 모두 처음부터 서로 아귀가 잘 맞는 것들을 골라서 했다는 주장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바로 깨닫게 된다. 이 역시 안산암을 가공해서 만든 것인데 이런 작업 또한 순전히 돌망치로 했단 말인가? 단단한 안산암을 이 정도로 가공할 수 있는 존재는 선사시대에 방문한 외계인들 뿐 이라는 에리히 폰 데니켄식의 주장을 받아들이긴 뭐하지만 과거 언젠가 상당한 수준의 가공기기와 기술 을 갖추고 이런 작업을 한 존재가 거기 있었음은 자명해 보인다. 삭사이와망 수추나 천문대의 계단 전경 수추나 천문대 계단은 직진도에 있어 초정밀 가공이 되어있다. 석재의 열가공이 이루어졌다? ‘레전더리 타임즈Legendary Times’라는 잡지의 발행인인 지오르지오 초우칼로스Giorgio A. Tsoukalos는 이런 안 산암 석재 표면이 욕실 거울처럼 매끈하게 가공되어있다고 지적하며 채석하기 위해 사용한 석재 가공용 톱자국으로 추정되는 십자형 교차자국crisscross을 발견할 수 있어 당시 기계가공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돌망치가 아니 라 이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채석과 표면 가공 장비가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의 주장 중 석재 표면이 ‘욕실 거울처럼 매끄럽다’는 부분을 좀 더 학문적으로 규명한 이가 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세인트 클라우드 대학St. Cloud University 지구과학과의 지질학 교수 이반 왓킨스Ivan Watkins 는 삭사이와망이나 올란타이탐보의 정밀 가공된 석재 표면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안산암이나 화강암은 60~70% 정도의 모스 경도 7인 석영 결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머지 성분은 이보다 경도가 작은 광물질류들minerals이다. 이런 석재 표면을 매끄럽게 가공하기 위해 최종 단계에서 연마재를 사용하여 윤내기를 Vol. 21, No. 3 83 남미 고대 거석문명의 미스터리 올란타이탐보에 있는 입방체로 가공된 석재들 오늘날 광학실험에 사용되는 금이 코팅된 오목거울형 광학기기 할 경우 연마재는 석재 표면에 골고루 분포 한 석영 결정들 대부분을 그냥 놔둔 채 나 머지 경도가 약한 광물질류들을 깎아낸다. 당연히 현미경으로 관찰되는 표면은 육안으 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거칠다. 이런 거침 은 손으로 만져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안데스에서 발견되는 석재의 가공표면은 손으로 만질 때 매우 매끄럽게 느껴진다. 현미경 관찰로도 실제로 연마재 가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 다면 연마재가 아닌 무엇으로 가공하여 이런 수준에 도달했을까? 왓킨스는 고에너지 밀도의 집속광集束光 처리를 통 해서 그런 매끄러운 표면을 구현했다고 주장한다. 연마재 가공 후 집속광을 쪼여 돌출된 석영 결정들을 녹아내리게 함으로써 주변의 패인 부분들을 메꾸어주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과학자로써 나름 매우 논리적인 접근과 결론이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안데스 산지의 유적들을 모두 잉카시대에 건설한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그는 잉카인들이 금(합금)으로 만든 오목거울gold parabolic mirror을 사용하여 그런 가공을 했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흔히 금 접시로 분류하는 잉카인들의 유물들 중에 오늘날 접시 안테나를 닮은 종류가 있다. 왓킨스는 이것들의 용도가 원래 접시가 아니라 광 집속용 오목거울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태양열 발전소는 태양광 집속기集束機 주변을 거울들이 둘러싼 형태로 지어진다. 이 거울들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오목 거울 형상으로 배열되며 태양빛은 이 거울들에 반사되어 태양광 집속기로 모인다. 이렇게 모인 태양광으 로 인해 쇠가 녹을 정도의 고온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잉카인들이 경도가 높 은 돌을 채석하고 표면 처리를 할 때 바로 이와 같은 원리를 사용했다는 것이 왓 킨스 주장의 요지다. 물론 그가 이런 가정을 하는데 어느 정도 근거가 있긴 하다.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Garcilaso de la Vega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시대에 쿠스 코에서 매년 태양 축제가 열렸는데 이 때 필요한 성화를 얻기 위해 오렌지 반개 크기의 오목 거울이 달린 팔찌를 사용해 바싹 마른 목화솜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잉카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금(합금) 접시를 그들이 이런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란 왓킨스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비록 성화를 만드는 정도의 간단한 작업에 그런 오목거울을 활용했을지 몰라도 안데스 산지에서 구현된 석 재 가공에 그런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는 게 매우 부적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석재 의 정밀 가공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나 기기들을 사용해 했을 것이 인문학 산책 84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확실하며 여러 사람들이 늘어서서 어설프게 반사경 오목거울을 비추어가며 하는 식은 아니었을 거란 게 내 판단이다. 16세기 잉카인들은 문명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시스템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바퀴도 사용할 줄 몰랐고 문자도 기 본적인 수학도 없었다.(그들의 선조들이 높은 수준의 문명을 구가했다는 증거는 있다.) 그런 그들이 이런 첨단 공학을 창안해내 사용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마도 금합금 접시는 선잉카 시대에 태양열 집속 용도로 사용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기의 주요 핵심 부속품이 그 정확한 용도가 잊힌 채 잉카인들에 유산으로 남겨진 것이 아닐까? 석재용 드릴 장비가 사용되었다는 증거 안데스에서 고경도 석재 가공에 기계나 첨단 장비를 사용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또 다른 결정적 증거가 쿠스코 코 리카차Coricacha에 있는 달의 신전Temple of Moon에 존재한다. 거기에 안산암 석재를 관통하는 구멍이 있는데 그 형상이 영락없이 몇 개의 나선형 패인자국spiral score marks이 남아있는 드릴 자국처럼 보인다! 단단한 안산함을 이 처럼 구멍 낼 수 있는 오늘날의 파워 드릴은 탄소 공구강에 다이아몬드 코어 비트diamond core bit가 부착되어있는 것을 사용한다. 이 유적으로부터 쿠스코 일대를 비롯한 안데스 산지의 거석 가공이 결코 잉카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생긴다. 잉카인들이 태양열 집속장치와 파워 드릴을 사용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런 작업을 했단 말인가? 쿠스코 코리카차의 달의 신전에 있는 구멍 뚫린 안산암 석재 구멍 부분을 확대한 사진 삭사이와망 유적의 제작 연대추정 삭사이와망에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 거대 암반 덩어리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피드라 칸사다Piedra Cansada 또는 친카나 그란데Chinkana Grande라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인근에 계단이 거꾸로 만들어져 있는 듯 보이는 암반Vol. 21, No. 3 85 남미 고대 거석문명의 미스터리 덩어리가 존재한다. 처음부터 그런 모양으로 만들었던 것일까? 원래 사람이 제대로 딛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는데 뒤 집힌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거대한 돌덩어리가 어떻게 뒤집힌 것일까? 그곳이 크고 작은 지진은 있었지만 이런 정도의 대변란을 일으킬 정도의 지진super-megathrust earthquake은 잉 카시대에는 결코 없었고 그 이전에도 구전이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지질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보면 약 1만 2천 년 전 기후변화가 일어나면서 빙하가 녹으며 이 정도의 대재앙이 안데스 일대를 휩쓸었을 수 있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 륙에서 그 때에 거대 포유류들의 멸종이 있었다. 그동안 이를 인간의 대량 학살 때문인 것으로 보았으나 최근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특히 남미 안데스 지역에서의 대량 멸종은 지질학적 변란과 유관하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알티플라노 고원이 그 즈음에 남쪽으로 급격히 기울면서 대지진 및 대규모 화산 폭발과 함께 쓰나미가 발생했 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기원전 11,000년경까지 알티플라노 고원엔 타우카라는 원시 호수가 있었는데 그 후 호숫물 이 대거 이동할 정도로 급격한 지각 변동이 발생하면서 코이파사라는 새로운 원시 호수가 생겼다고 한다. 이 정도의 큰 지각 변동이라면 삭사이와망에도 영향을 끼쳐 암반이 뿌리 채 뽑혀 뒤집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데스 일대에 인상적인 거석 유적을 남긴 이들이 그 정도로 오래 전에 거기에 살고 있었던 것일까? 이 런 가정만이 이 미스터리를 어느 정도 설명해줄 수 있다. 피드라 칸사다 인근에서 발견된 뒤집혀진 거석 유적 삭사이와망의 피드라 칸사다86 자연,터널 그리고 지하공간 ▨ 동탄~인덕원 복선전철 제9공구 건설공사(T/K) 1. 사업개요 □ 사업위치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서천동 일원 □ 사업목적 - 수도권 서남부 지역과 서울시 동남부 지역의 광역교통 기능 확충을 통한 대중교통 서비스 개선 - 대중교통 이용률 제고와 주변 철도노선의 활성화 및 대규모 택지개발에 따른 교통체증 해소 □ 사업기간 : 착공일로부터 60개월(시운전 포함) □ 노선 연장 : 3km878.67 [인덕원~동탄 사업구간 및 9공구 위치] 국내사업 원상훈 _ (주)한화건설 토목환경사업본부 상무 김주돈 _ (주)한화건설 토목기술영업팀 팀장 함희원 _ (주)한화건설 토목기술영업팀 과장 고성일 _ (주)단우기술단 전무이사Vol. 21, No. 3 87 국내사업 2. 주요 시설 □ 본선터널(NATM) : 3,756.87m(이중 1,575m는 TBM 확공) □ 정거장 1개소 : 개착 79.4m, 터널 승강장 42.4m / 본선 환기구 2개소 (신설되는 112 정거장은 기존 영통역과 환승토록 계획) [노선 평면도] 3. 도심지 발파영향 최소화를 위한 TBM+NATM 확공 공법 적용 □ 구간별 공법 적용 계획 - 노선 구간별 특성을 고려한 공법 적용 계획으로서 발파진동 제어가 필요한 도심 전구간은 TBM 확공, 보안물건 분포가 미미한 산악구간은 NATM공법 적용 - TBM 장비 직경은 5.0m로 계획하였으며, 터널 상반에 위치시켜 확공시 장비 운행효율 저하를 방지함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