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108 자연,터널그리고 지하공간인문학 산책터널! 인간의 삶을 묻다. 신라시대의 수레길(서울 금천구)고구려 시대 수렵도(무용총)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 금천구에서 발굴된 신라시대의 수레길은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장악했던 6세기경 만든 길이다. 도로 양측에는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를 합친 폭은 6미터 정도다. 중앙에는 2미터 폭으로 패인 수레바퀴 흔적이 있다. 신라의 초기 도읍지였던 금성5)은 수레를 중심으로 한 계획도로가 세밀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한민족이 말을 잘 다루는 기마민족이었다는 것은 무용총의 벽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보면 대륙 귀퉁이에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만 함부로 얕잡아볼 수 없었다. 대륙을 평정한 수나라도 고구려 정복에 실패했고 당나라도 신라와 오랜 혈전을 벌였지만 결국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거란의 10만 대군도 뛰어난 고구려 기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중국은 우리나라에서 말을 가지는 것을 늘 경계하였고 원나라 이후 많은 말을 조공으로 바치도록 하였다. 아예 목장까지 만들었던 원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 개국 초기 30여 년간 명나라가 가져간 말만 해도 5만 9천여 필에 이른다.6)기병이 탈 수 있는 말이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우리나라에는 조랑말밖에 남지 않았다. 관직이 높아도 말이 끄는 마차보다는 가마를 탈 수밖에 없었다.7) 마차가 다닐 만한 길도 거의 없었고 수레는 기껏해야 소달구지 정도였다. 말과 마차가 사라지고 기병이 없어지자 조선은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쟁에서는 말이 없다면 군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중국에 의해 평화가 지속될 때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중국이 혼란기에 접어들고 세력의 판도가 변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시 혹독한 시련을 겪은 것도 결국 기병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사력5) 금성(金城)은 경주의 남산, 소금강산, 서형산, 명활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지금의 경주의 중심 시가지에 해당한다. 이곳의 시가화로 신라시대 도로의 흔적은 자료로만 전한다.6) 1392년(태조)부터 1428년(세종)까지 36년간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친 말은 모두 59,000필이다. 청나라 역시 조선과 화친의 대가로 말 5,000필을 요구하였다. 조공무역이 상호 이익이 있었다고 하지만 말의 조공으로 기병을 구성하기 어려워진 조선의 군사력은 급격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의 안정 덕분에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왜와 청이 발호하자 평화는 쉽게 깨질 수밖에 없었고 조선은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7)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마차에 대한 기록은 살펴볼 수 없다. 궁성 외에는 마차가 다닐만한 길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Vol. 20, No. 3 109우리나라의 옜길조선시대의 주요간선도로이 약할 때 취하는 방어는 성을 쌓고 적이 침입하기 어렵게 길을 막는 것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길은 점점 더 협소해졌고 치도(治道)는 금기시될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 그리피스8)가 쓴 책 ‘은자의 나라’의 속뜻은 숨어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대동여지도의 길지도를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길찾기다. 길을 닦았다고 부관참시를 당하는 나라에서 길의 안내서인 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고개가 저어진다. 침략을 위해서는 군대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지도다. 그래서 신대륙에 도착한 유럽인이 먼저 한 일도 지도 제작이었고 19세기 서구 열강들이 우리나라 해안을 돌며 지도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김정호9)의 지도는 그러한 때 만들어졌다. 당연히 그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했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옥살이를 했는지, 대원군 묘자리를 위해 불려 다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수십 년간 전국을 떠돌며 만든 지도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쳤을 지는 능히 헤아려진다. 대동여지도는 목판 인쇄본이다. 남북 120리, 동서 80리를 한 면으로 하여 병풍식으로 만들었다. 모두 이어 붙이면 한 권의 서책이 된다. 길은 가는 직선으로 표시하였다. 산이나 하천 등 지형지물에 따라 꾸불꾸불 이어지는 길을 실제대로 그린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검은 색 한 가지 잉크로 찍는 목판이었기 때문에 산줄기나 물줄기와 혼돈을 피하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길에는 10리마다 표시를 하여 성· 읍· 현 간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쉽게 알 수 있게 하였다. 길은 직선으로 표시한 반면 산과 골짜기는 산악투영법10) 원리를 이용하여 실제대로 정확하게 연결하였다. 길은 물이나 계곡 등 지형지물과 자연스럽게 관계하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지도는 단순히 지리의 표시가 아니다. 길과 건축물, 강과 바다, 들과 산에는 그 터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며들기 마련이다. 땅에 남긴 흔적은 자연스럽게 8) 윌리엄 E. 그리피스(1843~1928). 미국의 자연과학자. 9) 김정호(1804~1866). 조선시대 실학자, 지리학자.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기존의 자료를 참고해 동여편고를 편찬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을 돌며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10) 산악투영법. 산세가 험하거나 완만한 정도 또는 높고 낮음에 따라 굵기를 달리하고 중심되는 산봉우리를 강조하여 그리는 방법이다.110 자연,터널그리고 지하공간인문학 산책터널! 인간의 삶을 묻다. 마포나루(구한말)역사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지도는 그림과 기호로 표시된 종합 인문서인 셈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모습은 많은 부분이 김정호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길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나 각 지방을 연결하던 길을 지금 살펴볼 수 있는 것도 모두 대동여지도 덕분이니 말이다.나루와 바닷길대동여지도나 청구도를 보면 길의 이름은 거의 볼 수 없는 반면 나루와 고개는 수없이 나온다. 길은 구지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고 해도 집이나 논밭을 돌아서면 어디로든 제한 없이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논두렁이나 강변, 산 둘레에는 어디든 사람의 발길이 있었다. 가급적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따라가면 그뿐이었다. 대동여지도의 길이 직선으로 그어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강이나 산을 만나면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안전하게 강을 건너자면 나루가 있는 곳에서 기다려야 했고 산을 넘자면 고개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나루는 물을 건너는 곳이다. 장에 가거나 제사 학교 과거 등 일을 치르려면 나룻배를 타고 물을 건너야 했다. 나루가 꼭 물을 건너기 위해서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루는 땅길이 물길로 바뀌는 지점이다. 실제로 큰 나루들은 물을 건너는 것보다는 짐을 부리는 역할이 더 컸다. 양곡은 역참과 조운을 통해 도읍으로 옮겨졌는데 나루는 두 곳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큰 강에는 일정구간마다 나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강만 해도 마포나루 광나루 미음나루가 있었고 영산강이나 금강 예성강 대동강도 예외 없이 나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조운은 거의 나루와 바닷길이 이용되었다. 전국을 잇는 10대 간선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개와 하천이 많아 수레를 끌기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운이 제도적으로 정립된 것은 고려시대인 992년(고려 성조 11년)이다. 조운선은 주로 연안을 따라 이동하였는데 크게 3개의 노선이 있었다. 가장 많은 조운선이 오가던 노선은 곡창지대였던 전라도에서 충청도 해안을 따라 북상한 뒤 강화 손돌목을 통해 마포나루로 들어오는 경로다. 하나는 의주에서 평안도 황해도 해안을 돌아 강화도 교동을 거쳐 마포나루에 닿는 경로다. 동해안의 물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함경도 서수라를 출발하여 강원도 경상도 해안을 따라 동래에 이르는 뱃길이 있었다. 해로와 한강을 따라 마포나루에 도착한 조운은 여기서부터는 육로를 따라 한성까지 옮겨졌다. 조운선이 출발하는 곳에는 조창과 진이 정비되어 물류의 편이를 도모할 수 있었다.11)11) 대표적인 조창으로는 창원의 마산창, 진주의 가산창, 밀양의 삼랑창, 아산의 공진창, 함열의 성당창, 옥구의 군산창이 있다.Vol. 20, No. 3 111우리나라의 옜길백두대간과 고갯길지명 중에서 나루 못지않게 많은 것이 고개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산맥을 대간 정간 정맥 지맥으로 나눈다.12) 대간은 백두산에서 금강산 설악산 속리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등뼈다. 여기서 동서방행으로 차령산맥 소백산맥 등 늑골같은 정맥이 뻗어 있다. 우리나라의 국토는 이렇게 산맥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의 이름이 영동 영서 영남 등 산맥에 의해 갈라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어디든지 고개를 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가장 험하고 높은 고개는 대부분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길에 있다. 가장 큰 고개는 대관령이다. 강릉지역을 일컫던 관동도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계령 진부령 미시령 역시 영동과 영서를 잇는 고개다. 북한에도 황초령 마식령 추가령 등 큰 고개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산맥과 지맥 그리고 그 사이에 강줄기가 있고 강의 시원에 고개가 있다. 산이 클수록 물은 좁고 산이 작을수록 물은 크다. 대동여지도를 자세히 보면 이렇게 반복되는 지형에서 일정한 규칙성이 나타난다. 근대 이전 우리나라의 길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이렇게 산맥과 골짜기 그리고 강과 지천을 따라서 이어졌기 때문이다. 고개와 나루도 비교적 산을 넘고 강을 건너기 쉬운 곳에 자연스럽게 놓여졌다.대륙으로 나가는 길, 의주대로비단길이 끝나는 곳은 어디일까. 유럽에서 파미르고원, 둔황을 거쳐 오는 비단길의 종점을 보통은 중국의 장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장안은 비단길의 끝이 아니다. 장안에서 다시 북경 의주를 지나 한양까지 이어지니 말이다. 의주대로는 동서양의 문명이 교류되는 길이었다. 한양에서 무악재를 넘어 개성 평양 의주까지 약 430킬로미터에 이른다. 근대 이전의 길 중에서 가장 번듯한 길이다. 이 길에는 매년 명나라 청나라로 오가는 사절단이 붐비었고 중국과 무역을 하는 상인들도 적지 않았다. 정초와 동지에 떠나는 정기적인 사절단은 4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수시 행차가 잦아 의주대로에는 곳곳마다 숙식소가 있었고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개성과 평양에서는 화려한 연회가 끊이지 않았다.의주대로는 조선시대 가장 활발한 길이었지만 이미 삼국시대부터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지던 오래된 길이다. 육로로는 중국과 우리나라를 잇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이 때문에 평상시에는 문물이 오가는 길이었지만 전시에는 침략로로 바뀌는 아픔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고려시대 여러 차례의 몽고 침입 역시 이 길을 통해서였다. 병자호란을 보면 의주대로가 얼마나 잘 닦여진 길인지 실감이 간다. 청 태종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1636년 12월 9일이었지만 이틀 뒤 평양, 나흘 뒤에는 개성까지 올 수 있었다. 12월 14일 인조는 강화로 피난을 가려고 하였으나 이미 청군은 서울 근교에 진을 치고 있었다. 무려 12만 명의 대군이 움직이는데 압록강에서 한양까지 5일도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12) 보통 산맥에는 강줄기가 따라가게 되는데 이를 정맥이라고 한다. 정간은 강줄기가 없는 산맥을 말하며 북한 함경도의 장백정간 하나뿐이다.112 자연,터널그리고 지하공간인문학 산책터널! 인간의 삶을 묻다. 문경새제(제3관문)통신사의 길, 영남대로영남대로와 의주대로는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고 그 중심에 도성이 있었다. 임란 당시에는 왜군이 명나라로 가기 위해 내달라는 길이 영남대로와 의주대로였지만 평상 시 이 길은 한·중· 일 3국의 사절단이 오가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의주대로는 중국의 연행사, 영남대로는 일본과의 통신사가 왕래하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한· 일간의 교류는 국란으로 중간에 단절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1428년부터 1811년까지 4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조선통신사는 임란 이전 60여 차례, 임란 이후 12차례 정도였다.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보내온 일본국왕사는 횟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훨씬 많았다. 별로 아쉬울 게 없었던 우리나라가 교린차원에서 통신사를 보냈던 데 비해 일본은 대륙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만큼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우리나라 구간인 영남대로는 서울에서 출발해 문경 밀양 부산까지 400킬로미터가 조금 못된다. 뱃길은 쓰시마와 시노모세키를 거쳐 오사카까지 약 1000킬로미터에 이른다. 조선초기에는 오사카에 인접한 교토에 막부가 있었기 때문에 일정이 짧았다. 그러나 임란 이후 일본의 중심이 도쿄로 옮겨가면서 통신사의 여정도 오사카에서 교토를 지나 도쿄까지 가게 되었다. 이렇게 길어진 육로는 영남대로와 비슷한 400킬로미터 정도였다13). 이 길을 모두 합치면 1800킬로미터에 이른다. 거리도 그렇지만 5백여 명이나 되는 사절단의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한 번 다녀오는 기간은 1년 가까이 소요되었는데 이들을 접대하는데 들어가는 경비는 양국의 큰 부담이었다. 통신사와 국왕사의 왕래는 정부 간 교류뿐 아니라 민간에 있어서도 활발한 문물이 교류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비록 아픈 역사가 있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길항해 온 한· 일 양국이 통신사와 국왕사의 전통을 되살린다면 보다 긍정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아시아 32개국이 함께 추진하는 아시안 하이웨이14)의 첫 번째 도로(AH1)는 통신사가 오가던 일본의 육로와 영남대로 그리고 의주대로를 따라가는 길이다15). 현재는 북한이 가입하지 않아 끊겨져있지만 모두 연결된다면 고대 실크로드가 다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을 것이다.13) 통신사가 왕래한 길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바다와 육로를 이용해야하는 일본의 경우는 자주 바뀌었는데 가장 길었을 때는 왕복 4700km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14) 아시안 하이웨이(Asian Highway).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아시아 도로연결사업으로 현재 32개국에 걸쳐 모두 55개의 노선망이 구축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AH1(경부고속도로 구간), AH6(동해안 7번국도 구간) 두 개의 노선이 있다.15) AH1. 아시안 하이웨이 1번 도로로 일본 한국 중국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나라 구간은 경부고속도로이기 때문에 영남대로와 차이가 있기는 하다. 일본 구간도 통신사길은 오사카에서 시모노새끼까지 수로지만 지금은 육로가 대신한다.Vol. 20, No. 3 113우리나라의 옜길육로교통의 중심, 삼남대로해남에서 한양을 거쳐 경흥까지 이어지는 삼남· 경흥대로는 의주· 영남대로와 함께 우리나라의 남북을 잇는 또 하나의 축이다. 그중에서도 한양과 충청· 전라· 경상을 잇는 삼남대로는 우리나라 육로교통의 중심이다. 실제로도 가장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다. 산악과 고개를 많은 영남대로에 비해 삼남대로는 거의 평탄한 길이 이어졌기 때문에 다니기가 편했다.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수원 천안을 거쳐 해남까지 이어진다. 천안삼거리는 삼남대로의 중심이며 상징적인 곳이다. 여기서 논산 쪽으로 가면 전주를 거쳐 해남에 이르고 청주 쪽으로 가면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 경주 부산으로 이어졌다. 북쪽으로는 평택 수원을 거쳐 한양에 이른다. 삼남대로는 해남의 이진항까지 이어진다. 한양에서 과천 수원 천안삼거리, 그리고 다시 논산 정읍 나주를 거쳐 해남까지 물경 400킬로미터가 넘는다. 그러나 해남 이진항은 삼남대로의 끝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다시 제주까지 뱃길이 이어지니 말이다.영남대로와 삼남대로가 대비되는 또 하나는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희비가 엇갈리는 과거와 귀양이다. 조선시대 영향력이 큰 서원은 주로 영남지역에 분포되어 있었고 서원을 통해 많은 인재를 정계에 진출시켰다. 영남대로에 과거길이라는 대명사가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삼남대로는 정변의 와중에서 실각한 양반들이 귀양을 떠나는 길이었다. 조선 초만 해도 귀양은 관직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때 조정의 요직에 있던 이들의 귀향은 자칫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연고지가 배제되자 상대적으로 정계 진출이 적었던 전라도나 제주 지역이 귀양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로 귀양 간 광해군이나 김정희 송시열을 비롯하여 강진의 정약용, 흑산도의 정약전, 보길도의 윤선도 등은 모두 삼남대로를 따라 귀양지로 갔다.114 자연,터널그리고 지하공간인문학 산책터널! 인간의 삶을 묻다. 뉴턴의 만유인력법칙 증명을 위한 지구 반경 측정1665년 경 아이작 뉴턴은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했고 이 법칙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만유인력 법칙은 사과나 달이 똑같이 지구의 중력에 의해 끌어당겨진다는 것으로 그 미치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야했다. 당시 알려진 지표 근처의 사과에 작용하는 중력 가속도는 9.780 m/s2 였다. 그렇다면 달에 작용하는 중력 가속도는 얼마나 될까? 당시 달 중심이 지구 중심에서 지구 반지름의 60배 정도 떨어져 있다는 천문학자들의 관측결과가 알려져 있었으므로 뉴턴은 자신의 만유인력 법칙이 옳다면, 이 값은 지구 표면에서의 중력 가속도의 이 되어야 했다. 뉴턴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달에 작용하는 중력 가속도 값을 구할 수 있었다.달의 속도를 , 달의 공전 주기를 , 달의 공전 평균 반경을 , 지구 반경을 이라고 할 때, 달의 원심가속도 이다. = 2,360,580초(27일 7시간 43분)을 대입하여 정리하면, × s-2이 된다. 다른 외력의 작용을 무시할 경우 이 원심력은 지구 중력에 의한 구심력과 일치해야 한다. 따라서 × 이 성립한다. 이 식에서 지구 반지름 × × 이 얻어진다. 그런데, 뉴턴이 이 문제에 골몰해있던 시기에 정확한 지구 반경이 아직 측정되지 못했다.아이작 뉴턴과 기자 대피라미드의 신성한 큐빗맹성렬우석대학교 교수Vol. 20, No. 3 115아이작 뉴턴과 기자 대피라미드의 신성한 큐빗고대 그리스 시대에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 둘레길이를 252,000 스타디아로 측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지만, 30%까지 차이가 나는 여러 스타디온 단위가 존재해서 이 수치로는 정확한 지구 반지름을 구할 수 없었다. 뉴턴이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던 시기에 어느 정도 근사치에 이르는 지구 반지름 측정값이 알려져 있었다. 1617년 광학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법칙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수학자 스넬Willebrord van Roijen Snell은 에라토스테네스에 관한 책 《바타비아의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Batavus》를 출판했는데 거기에 자신이 2년 전 삼각 측량에 의해 구한 지구 크기 측정 결과를 실었다. 그는 이 책에서 지구 평균 반지름이 대략 6,147킬로미터가 되는 것으로 기술했다. 스넬은 자신의 측정치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재측정을 시도하다가 도중에 사망했다. 이 수치에 대해서 뉴턴이 늦어도 1672년경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하지만 이 수치를 사용하면 지구 중력에 의한 달의 구심 가속도는 당시 알려진 지표면에서의 중력 가속도의 보다 3.8% 정도 작게 나오기 때문에 뉴턴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뉴턴이 ‘달 시험’을 통해 어느 정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때는 16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1671년에 프랑스 천문학자 장 피카르Jean-Luc Picard는 스넬이 개발한 삼각측량법을 사용해 지구 평균 반지름 6,372킬로미터를 얻었고 측량이 끝난 후 5년쯤 뒤에 공식 발표했다. 뉴턴은 이 지구 반지름 값으로부터 지구 중력에 의한 달의 구심 가속도가 당시 알려진 지표면에서의 중력 가속도의 보다 0.30% 정도 작다는 결론을 1687년《프린키피아Principia》 초판에 발표했다.뉴턴과 유대의 신성한 큐빗 뉴턴은 지구 반경의 정확한 측정치가 알려지기 이전에 이 값에 대한 정보를 유대 고문헌에서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야훼 신으로부터 받은 지구 크기에 대한 정보는 신성한 큐빗Sacred Cubit에 담겨 있으며, 지구 반경의 천만분의 1에 해당하는 값이다.(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1미터는 파리를 지나는 사분자오선의 천만분의 1에 해당하는 길이다.) 신성한 큐빗은 대표적인 ‘잃어버린 고대의 성스러운 지식’으로 성경과 탈무드 등 여러 유대 문서들을 조사하면 그 정확한 값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찾아보니 0.5913미터에서 0.7097미터까지 너무 다양한 값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뉴턴은 유대 문서들만으로는 신성한 큐빗의 정확한 값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대 건축물에서 그 수치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가 보기에 선민인 유대인들이 이집트 땅으로 이주하면서 고도의 문명을 이집트 땅에 전달했고, 그 결과 기자 대피라미드가 건설되었음이 틀림없었다.뉴턴은 구약 기록에서 BC 17세기 경 요셉을 필두로 한 유대인들이 이집트 땅에 들어갔다고 되어있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들이 이집트 땅에 신성한 큐빗 단위를 전파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의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피라미드들을 건설하도록 시켰다고 되어있다. 뉴턴은 피라미드 건설이 본래 유대인들의 건축술이었음을 확신했다. 구약에 묘사된 유대인들의 이집트 탈출은 대략 BC 13세기 경 람세스 통치기Ramsside period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헤로도토스는 기자 대피라미드를 건축한 쿠푸 왕이 람세스3세의 뒤를 이116 자연,터널그리고 지하공간인문학 산책터널! 인간의 삶을 묻다. 은 왕이라고 잘못 기록했다. 뉴턴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연대 계산을 해서 쿠푸 왕의 통치가 BC 9세기경에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는 쿠푸 왕 시절 건축된 대피라미드에 유대인들의 기술과 전통이 그대로 온전하게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대피라미드 건축에 사용된 측정단위에 야훼로부터 전해진 신성한 큐빗이 포함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를 건축한 지식이 유대인들로부터 나왔다고 굳게 믿게 된 뉴턴은 현재 가장 잘 보존되어있는 기자 대피라미드 어딘가에 이 신성한 큐빗 단위를 구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신성한 큐빗이 지구 크기에 대한 아주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확신했다.기자 대피라미드에 신성한 큐빗이 존재하는가뉴턴이 이 문제에 골몰하고 있던 1646년에 마침 옥스퍼드 대학의 존 그리브즈 교수가 기자 대피라미드의 내부를 탐사하고 쓴 책인 《피라미도그라피아Pyramidographia》가 출간되었다. 뉴턴은 그 책에서 제시한 측량 수치들 중에서 지구 크기에 대한 정보가 담긴 신성한 큐빗 값을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존 그리브즈의 책에는 전형적인 고대 이집트 측정단위인 ‘왕의 큐빗royal cubit’만 존재했다. 결국 그는 기자 대피라미드가 단지 무덤에 불과하며 오직 이집트 고유의 왕의 큐빗만 적용되어 건설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뉴턴은 이런저런 추론을 통해 신성한 큐빗이 왕의 큐빗의 6/5라고 결론짓고 존 그리브즈가 대피라미드의 ‘왕의 방’에서 얻은 왕의 큐빗값인 0.5239미터로부터 신성한 큐빗을 계산해 0.6287미터를 얻었다. 이 값은 피카르가 구한 지구 반경의 천만분의 일보다 작은 값으로 기자 대피라 미드에 지구 반경이 암호화되어있을 것이란 뉴턴 자신의 가정을 전혀 충족 해주지 못했다.뉴턴 시대로부터 1세기 후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천문학자 피아치 스미스Charles Piazzi Smyth는 뉴턴의 신성한 큐빗에 대한 최초 추론이 옳다는 굳은 믿음으로 기자 대피라미드 수치를 샅샅이 조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대피라미드를 측정하기 위해서 특별히 정밀 측정 장비를 제작했다. 거기에는 온도 변화에 따른 자의 길이 변화를 보정하기 위한 온도계까지 부착되어있었다. 그는 이런 정밀 측정을 토대로 대피라미드에 지구 반경이 반영된 신성한 큐빗이 존재함을 증명하려고 했다. 처음에 그는 대피라미드 외부 치수에 그 정보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정확한 밑변 길이를 재려고 노력했지만 당시 밑변 부분의 일부가 땅속에 파묻혀있어서 그가 원하는 정밀 측정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피라미드 내부의 방들에 대해서 정밀 측정에 들어갔다. 1867년 측량 결과를 정리한 그의 야심작 《대피라미드에서의 생활과 작업Life and Work at the Great Pyramid》이 출간되었다. 총 3권으로 출판된 이 책에는 기자 대피라미드의 안과 《피라미도그라피아Pyramidographia》 표지Vol. 20, No. 3 117아이작 뉴턴과 기자 대피라미드의 신성한 큐빗밖에 여러 치수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되어있는데 기존 측량가들의 결과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 이전에 존 그리브즈나 아이작 뉴턴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의 방’에 주로 관심을 보였는데 이 책에는 ‘여왕의 방’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었다. 스미스는 여왕의 방 동쪽 벽에 존재하는 쌍 계단 형태의 벽감에 주목했다. 여왕의 방 동쪽 벽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그림처럼 중앙 상단이 뾰족하다. 그런데 벽감 꼭대기가 이 뾰족한 천정에 정렬되어 있지 않고 비껴나 있다는 사실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측정해보니 중앙으로부터의 벗어남은 0.6350미터에서 0.6426미터 사이로 그가 보기에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신성한 큐빗’이었다!기자 대피라미드의 신성한 큐빗 존재를 부정한 플린더스 피트리피아치 스미스의 친구 중에 영국인 측량가 윌리엄 피트리William Petrie가 있었다. 이 사람의 아들이 바로 최초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고고학적 방법론을 제시한 플린더스 피트리다. 친구가 쓴 책을 접한 윌리엄 피트리는 기자 대피라미드의 매력에 홀딱 빠져버렸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그의 아들 플린더스 피트리는 신으로부터 받은 놀라운 지식이 기자 대피라미드에 암호화되어있다는 스미스의 주장을 적극 옹호하면서 그의 비판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1874년 플린더스 피트리는 《대피라미드 연구 Research on the Great Pyramid》라는 책을 써서 대피라미드의 디자인과 구조에 대해 해석한 피아치 스미스의 주장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우호적 관계는 18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깨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피아치 스미스는 신성한 큐빗에 대해 더욱 집착하게 되었고, 기자 대피라미드에 인류의 운명에 대한 계시가 기록되어있다는 식의 신비주의에 빠져버렸다. 플린더스 피트리는 처음부터 영국인들이 잃어버린 고대 이스라엘 10지파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으며 스미스가 점점 기자 피라미드에 대해 종교적으로 편향된 주장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더 이상 그의 주장을 옹호하지 말아야겠다고 판단하고 이를 공공연하게 비판했다.기자 대피라미드 여왕의 방 전경. 천정 중앙선에 정렬되비 않은 벽감이 보인다.《대피라미드에서의 생활과 작업Life and Work at the Great Pyramid》2권 표지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