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4, No. 5, 2025146 홍천 비발디파크를 가다 연세대학교 오재현 명예교수 4 월 20 일 11 시 , 사위 우덕기 군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 딸 , 외손자 일행 4 명이 삼성노블카운티를 떠났다 . 오늘의 목적지 는 홍천 비발디파크이다 . 고속도로 판교 I.C 에서 순환고속도 로를 타고 하남시로 빠져 팔당댐 아래 팔당대교를 건넜다 . 여 기서부터 양평까지 남한강 , 북한강을 끼고 바라보면서 특등 드라이브코스 , 강변도로가 펼쳐진다 . 이 드라이브코스를 달릴 때마다 가슴이 뛴다 . 양수리를 중심으로 세미원 , 수종사 , 정약 용 생가 , 두물머리 등 볼거리가 많지만 , 두물머리에 앉아 북한 강 , 남한강이 합쳐져 바다 같은 양수리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 최고의 경관이다 . 둘이 하나가 되려면 양수리같이 물을 받치 는 그릇이 커야 한다 . 대결 사회에서 경쟁 사회로 , 중용 ( 中庸 ) 의 길을 택하여 통합을 이루려면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 12 시 반 , 우리는 비발디파크가 위치한 홍천군 서면과 가까 운 양평군 단원면 단원로 408, 메밀가 (031-771-9660) 에서 차 를 세웠다 . 점심을 먹기 위해서이다 . 용문로 , 단원로 벚꽃 가 로수의 늦은 꽃잎이 싸라기눈처럼 바람에 휘날리고 , 화창한 봄 날씨와 짙어가는 녹음이 소풍가는 아동처럼 마음을 들뜨게 한다 . 이 “ 메밀가 ” 는 이름난 메밀국숫집이라고 한다 . 한적한 도 롯가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 대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 30 분쯤 기다려 겨우 식탁에 자리 잡았다 . 먼저 만두가 나왔다 . 그리 고 양념 고추장이 소복이 덮인 메밀국수가 나왔다 . 기대한 만큼 만두도 메밀국수도 맛이 좋았다 . 작년 8 월 거창 ( 居昌 ) 나들 이 끝에 점심으로 먹은 초계탕 생각이 난다 . 역시 시골 국도변 한적한 산장 같은 단독 집이었다 . 메밀국수 사리를 닭가슴살 이 담뿍 담긴 양념에 비벼서 먹는다 . 이것이 초계탕이다 . 그 맛이 일품이다 . 연하고 쫄깃한 닭 다리와 닭 날개가 별도로 나 왔다 . 6 개월 병아리의 백숙 같기도 하고 , 찜 같기도 하다 . 만복인데도 젓가락이 계속 움직인다 . 단조로운 이 메뉴 맛에 초계 탕의 품격을 느꼈다 . 메밀가에서 5 분도 안 되어 홍천 비발디파크의 입구를 통과하자 , 단원로가 끝나고 한치골길로 접어들었다 . 이 홍천군 서 면 일대 산 중턱에 비발디파크의 여러 가지 놀이시설과 호텔 등이 보인다 . 스키장도 보이고 오션월드도 보인다 . 우리는 한 치골길을 따라 소노비발디 골프장을 지나서 소노펠리체빌리지에 여장을 풀었다 . 중세 유럽풍의 주택을 연상케 하는 4, 5 층 건물이 드문드문 서 있는 두류산 자락의 한적한 마을이다 . 60 평의 숙소 ( 콘도 ) 는 방이 세 개 , 거실 겸 주방으로 되어 있다 . 방마다 화장실과 목욕탕이 딸려 있다 . 소노호텔 ( 예전의 대명콘도 ) 중에서 이렇게 호화스러운 호텔은 처음이다 . 거실 앞 발코니에 나가면 바로 아래 골프장의 전경이 보이고 골프 장 주변에 서 있는 이채로운 호텔건물이 시선을 끈다 .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외손녀 가족과 합류했다 . 외손녀 , 외손서와 외증손녀 ‘ 서아 ’ 세 사람이다 . 어제 이곳에 와 메밀국수집 대형 간판앞에서 필자와 우덕기군주암칼럼 147 자원리싸이클링 제 34 권 제 5 호 , 2025 서 하룻밤을 자고 오늘 저녁을 같이 먹고서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단다 . 내일은 출근도 하고 서아가 학교에 가야 하니까 . 귀 염둥이 서아는 지난 3 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 앞니가 두 개 빠져있는 서아는 거실 앞 발코니에 나가 , 신나게 줄넘기를 하고 있다 . 이렇게 딸의 가족 6 명이 다 모였다 . 2000년 9월 13일 추석날 저녁의 우리 가족 내 가족은 오랫동안 10 명이었다 . 아들 식구 4 명 , 딸 식구 4 명 , 그리고 우리 부부 2 명 , 합 10 명이다 . 그런데 2017 년 외손 녀 ‘ 지민 ’ 이가 결혼을 하고 , 외증손녀 ‘ 서아 ’ 가 탄생하자 12 명으로 가족이 늘어났다 . 20 년 가까이 어린이가 없던 집안에 ‘ 서아 ’ 는 단연코 애굣덩어리고 인기를 독차지했다 . 추석 , 설 , 그리고 내 생일날에 분당 파크타운 집에 모였다 . 10 명 가족일 때도 비좁던 식탁 자리가 12 명이 되니까 더욱 비좁았다 . 그래서 더 행복했다 . 아내가 하늘나라로 가고 가족 11 명이 지금도 설날 , 내 생일날 그 리고 아내의 기일에 모인다 . 모두 건강하고 여유 있게 생활하고 있으 니 다복한 가족이다 . 그런데 분당 파크타운 아파트에서 12 명이 북적 대던 그때 생각이 자꾸만 난다 . 아내와 며느리가 부엌 마룻바닥에 앉 아 따끈따끈하게 부친 고기 전을 즉석에서 손녀들과 경쟁하다시피 먹어치우던 생각도 난다 . 실버타운의 현 생활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 왜 그런 난데없는 비교를 해보는가 . 그것은 이곳 실버타운에 입주하 여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실히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 가정은 생활의 원천이고 , 활동의 원동력이다 . 내가 90 세가 넘도 록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단란한 가족과 따뜻한 가정이 있었기 때문 이 아닌가 싶다 . 내가 힘들게 고려아연 ( 주 ) 에 취직시킨 제자 K 군이 2 년 근무하고서는 나한테 말도 없이 사직하고 용산공고의 교사가 되 었다 . 그리고 역시 서울에서 모 공고 교사인 부인과 합쳐졌다 . 후일 나는 K 군을 만났을 때 “ 잘했다 , 잘했어 ” 격려해 주었다 . 제자들이 출세하지 않아도 좋다 . 행복했으면 좋겠다 . 구세대 사람은 구식으로 살아야 아름답다 . 6 시 우리 7 명은 저녁을 먹으러 ‘ 참소나무농원 ’ 을 찾았다 . 홍천군 2001년 6월 10일 아들 정탁이가 미국 연수 가기 전월의 우리 가족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4, No. 5, 2025148 서면 안굴업길 40-16(033-435-6639) 의 깊은 산골 외딴집이다 . 토종닭 백숙이 나왔다 . 나는 다리 하나만 먹었는데도 만복 이다 . 다른 요리가 필요 없다 . 7 시 반 외손녀 식구는 서울을 향하여 떠났다 . 잠실 집까지 한 시간 25 분 소요된다고 휴대전 화에 찍혔다 . 추석날 오후 고기 전을 부치고 있는 아내 황계주 여사소노펠리체 빌리지 전경 이튿날 아침 우리는 골프장 입구에 자리 잡은 클럽하우스에서 아침을 먹었다 . 180 도로 탁 트인 홀 유리창 너머로 잘 가 꾼 골프장이 클럽하우스 전면에 전개되고 , 우리의 시선을 빼앗았다 . 오늘이 주초 월요일이고 아침 8 시인데도 벌써 서너 팀 이 공을 날리고 있다 . 호화스러운 홀의 유리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싱그러운 바깥 경치를 보면서 외손자가 가져다준 뷔페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하였다 . 2025년 1월 29일 설날의 우리가족(11명), 삼성노블카운티 한수원에서 어젯밤 잠잤던 숙소가 대각선으로 멀리 보이고 , 골프장 주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모양의 호텔들이 가까이 보인다 . 그리 고 겹겹이 겹쳐진 강원도의 산들이 이 골프장을 둘러싸고 있다 . 나는 제왕이나 된 것처럼 시간에 제약받지 않고 아침 식사 를 즐겼다 .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잘살게 되었는가 . 일제 강점기도 , 8.15 광복 후에도 매년 4 월 이맘때가 되면 보릿고개 로 우리는 많이 굶어야 했다 .주암칼럼 149 자원리싸이클링 제 34 권 제 5 호 , 2025 1988 년도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하던 해였다 . 나는 집사람과 같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한 우리 분야의 최대 학회 IMPC 학술대회에 참가 후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했다 . 우리나라 1 인당 GDP 가 겨우 5,000$ 인 시대였다 . 리무진 버스 를 타고 이탈리아의 농촌을 지나면서 마을 가에 드문드문 자가용 승용차가 보였다 . 우리나라도 언제 저런 날이 올 것인가 하고 부러워했다 . 그런데 내 고향 산간마을에도 주차할 곳이 없어 헤매는 게 오래되었다 . 지금 우리나라 1 인당 GDP 가 곧 40,000$ 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 나는 이렇게 잘 사는 것이 왜인지 불안하다 . 우 리는 온 힘을 다하여 앞만 바라보고 산 정상에 올라왔다 . 이제는 하산할 차례다 . 하산할 때가 사고가 자주 난다 . 한 발짝 조 심조심하고 주위도 살피면서 하산해야 한다 . 뒤돌아보고 산 전체도 파악하면서 하산해야 한다 . 경제 대국답게 문화 수준 을 높여야 한다 . 잘 할 수 있을까 . 97 세 노인의 소망을 담아본다 . 두류산 자연휴양림을 걸어 보고 싶다 . 곤돌라를 타고 양떼목장이 있는 매봉산 정상에 올라 홍천의 경관도 조망하고 싶 다 . 이러한 욕심을 뒤로하고 , 또 클럽하우스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비발디파크를 떠났다 . 10 시 반 ,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홍천 6 경에 들어있는 공작산 수타사 ( 壽 陁 寺 ) 에 들렀다 . 708 년 신라 선덕왕 7 년에 창건한 절이며 , 월정사의 말사 ( 末寺 ) 라고 한다 . 수타사보다는 ‘ 수타사 산소길 ’ 에 더 관심이 간다 . 이 길은 수타사를 끼고 공작산 생태숲을 지나 계곡을 따라 돌아보는 3.8km 의 트레킹코스이다 . 옛날 40 년간 일요일이면 반드시 등산하던 추억이 되살아 난다 . 주차장에서 수타사까지는 500m, 계곡의 평평한 숲길이다 . 왕복 1km 를 , 힘들었지만 무사히 혼자 걸은 것이 흐뭇하 였다 . 클럽하우스에서 조망되는 골프장과 호텔들 맨 왼쪽은 어젯밤 숙소인 소노펠리체빌리지 호화스러운 클럽하우스의 레스토랑 이로써 , 아마 딸 가족과의 마지막 나들이가 될지도 모르는 1 박 2 일의 여정이 마감되었다 . (2025. 5. 10. 기 )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4, No. 5, 2025150 실버타운에서의 독서편력(4) - 심원(心遠) 송복(宋復) - 연세대학교 오재현 명예교수 송복 저 〈 중용 ( 中庸 ) 의 길 - 류성룡의 리더십 -〉 이라는 책 을 보내왔다 . 출판 (2025.4.8.) 된 지 10 일 만이다 . 이 책의 서 문 중에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 「정치는 어느 시대고 정치인들끼리 그리고 그 정치인 등이 속한 당파나 정당끼리 서로 경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 의 정치전통은 경쟁은 없고 오직 대결만 있었다. 대결은 더 낫 고 못한 것의 겨룸이 아니라 아예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 다. 그 싸움은 끝장을 보는 사생결단이다. 경쟁은 져도 반드시 기회가 온다. 그러나 대결은 지면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 대결의 끝은 인재고갈이고, 폭정의 연속이고, 마침내 끝없 는 가난의 지속이며, 정체였다. 역사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 했다. 그리고 망했다. 지금의 우리 정치도 크게 다를 바가 없 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극한 대결의 상태가 되어 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5∼6대 군사 대국까지, 거기에 중진국 함정 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진입한 유일한 나라, 그래서 모든 중진국의 교본( 敎本 )이 되어 있는 나라, 그 나라의 정치판이 어째 서 생( 生 )과 사( 死 )를 거는 ‘대결’의 장이 되어 있을까?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고 더 새롭고 지속적인 발전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 서로의 에너지를 충전‧재충전시켜 전혀 다른 차원의 새 방법을 찾고 새길을 열어가는 그 ‘경쟁’을 어째서 우리 정치 는 하지 못할까?」 위의 글은 우리나라 정치인에게 깊은 경종을 울리고 반성케 하고 ,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그러니까 지난 2025 년 5 월 23 일 , 송복 교수가 용인시의 구석진 이곳을 찾아 주셨다 . 이번이 두 번째이다 . 항상 김용민 상무 ( 삼표 ) 가 모시고 왔다 . 송복 교수로부터 석사학위를 취득한 애제자다 . 첫 번째는 2022 년 12 월 14 일이었다 . 그 때 송복 교수가 3 권의 ‘ 철학과 현실 ’ 계간잡지를 들고 와서 언젠가는 오 교수 이야기도 나올 거라면서 주고 갔다 . 이 무렵 계간잡지 ‘ 철학과 현실 ’ 에 「 송복 자전에세이 」 를 연재하고 있었다 . 2021 년 봄 (128 호 ) 에 시작하여 2022 년 겨울 (135 호 ) 까 지 8 회를 이어오고 있다 . 출생에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 2022 년 겨울 135 호 「 송복 자전에세이 」 의 주제는 “ 독립운동 (2)” 이고 ‘ 의 ( 義 ) 와 효 ( 效 )’ 에 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우리나라 무장독립군이 아무리 용감하여도 , 의가 높다 하여도 일본군 , 관동군을 이길 수 없다 . 그 돈으로 교육사업을 하는 것이 효과적인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송복 교수의 지론이다 . 무장독립군을 이처럼 평하는 것은 송복 교수가 처음 아닌가 싶다 . 후일 무장독립군 후손으로부터 항의가 있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 1910 년 문중 땅 수백만 평을 팔아 만주에 가서 군관학교를 세우는 등 무장독립운동을 한 이희영의 후손으로부터 ‘ 아무것도 모르면서 글을 쓰느냐 ’ 고 항의가 있었다고 하였다 . 송복 교수의 글은 직설적이다 . 세상에 맞서는 용기의 소유자이다 . 제자와 논쟁을 할 수 없다고 , 논단에 붓을 놓고 있던 송복 교수가 오랜만에 대한언론 380 호 (2017.11.1) 에 “ 정치와 안보는 실험대상이 아니다 ” 라고 , 문재인 대통령에게 송복교수와 그의 저서주암칼럼 151 자원리싸이클링 제 34 권 제 5 호 , 2025 옐로카드를 띄웠다 . 이렇게 대담하다 . 1, 2 차 이곳 방문의 중간쯤 되는 2024 년 11 월 말 , 동양사회사상학회의 학회지 “ 사회사상과 문화 , 26 권 3 호 (2023)” 를 송 복 교수로부터 받았다 . 이 학회지는 “ 혜안과 논찬 , 송복 ” 이라는 특집호로 , 송복 교수의 제자 또는 후학이 송복 교수를 논하 고 있다 . 무려 241 페이지의 대 분량이다 . 목차를 아래에 적어 본다 . 1. 심원 ( 心遠 ) 송복 교수와의 대담 - 최우영 , 정승안 , 박수호 2. 심원 송복 교수의 생애 , 가치지향 , 그리고 학문 - 정하섭 3. 심원 송복 선생의 학문의 세계 - 김왕배 4. 사회학자 송복과 송복의 사회학 - 전상인 5. 경계에 선 학자 - 문상석 이 책은 송복 교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 제자가 , 동학 후배가 이렇게 스승을 탐색하고 특집호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 는다는 것은 학자로서 교수로서 이 이상의 영광이 없다 . 이러한 요지의 편지를 써 송복 교수에게 보내어 축하하였다 . 송복 교수는 휴대전화를 안 가지고 있다 . 그 무거운 것을 왜 가지고 다니느냐고 했다 . 메일도 있기는 하지만 열어보지 않는다 . 철저한 자유인이다 . 그래서 우리는 전 세기의 사람처럼 항상 편지로 소통하였다 . 송복 교수의 글씨는 유별난 명필 이 아닌가 , 편지를 읽는데 즐거움 반 , 고통이 반이었다 . 이 특집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 특히 송복 교수와의 대담에서 그 리고 전상인 교수의 ‘ 사회학자 송복과 송복의 사회학 ’ 에서 공학도에게는 생소한 인문학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 송복 교수의 학문 배경은 인문학이다 . 모든 저서 , 저술 , 투고 내용의 기초는 인문학이라고 한다 . 즉 학문의 기초는 인문 학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인문학은 문 ( 문학 ), 사 ( 역사 ), 철 ( 철학 ) 이다 . 문학은 시와 소설이 대표적 이며 시와 소설은 언어의 공장이다 . 즉 말 공장이고 , 글 공장이다 . 역사는 경험의 공장이다 . 지나온 경험이 역사인데 ,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통찰력이 발달한다 . 역사는 통찰력의 언어이 다 . 현재를 성찰하게 하고 , 과거를 깊이 분석하게 함으로써 미래의 비전을 갖게 한다 . 철학은 사유의 공장이다 . 사유의 언어는 자기를 객관화시키고 , 주관에서 벗어나서 생각 ( 사유 ) 하게 한다 . 사유가 없는 글은 알 수 없는 ( 이해할 수 없는 ) 경우가 많다 . 쉽게 타인이 알 수 있게 써야 한다 . 그러지 못한 대학교수의 글을 심심찮게 본다 . 그래서 신문기자가 대학교수를 우습게 본다 . 여담이지만 , 공장 기술자가 공과대학 교수를 우습게 보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다 . 현장에 와서 현장을 잘 모르면서 아는체하며 이렇군 , 저렇군 . 떠들고 있는 것이 가소롭다는 것이다 . 전상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명예교수의 칼럼을 조선일보에서 자주 본다 . 전상인 교수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생 시절 사회학과에서 송복 교수의 강의를 죄다 수강하였다고 한다 . 나중에 정치학에서 사회학으로 전과 ( 轉科 ) 하게 된 것도 송복 선생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 ‘ 사회학자 송복과 송복의 사회학 ’ 이라는 전상인 교수의 논설은 1. ‘ 사회학자 송복 ’ 생장기 ( 生長記 ) 2. ‘ 선비 프로페서 ’ 송복 선생의 사는 법 3. 송복 선생의 공공사회학 4. 송복 선생의 인문사회학 5. 송복 선생의 정치사회학 으로 구성되어 있다 . 송복 선생에 관한 전상인 교수의 논설 중 1, 2 는 아마 서너 번은 읽었을 것이다 . 내가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잘 정리되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4, No. 5, 2025152 어 있다 . 그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 , 에피소드 중에서 딱 하나만 인용한다면 , 북한산에 관한 이야기다 . 송복 선생의 유일한 취미가 북한산 등산이다 . 송복 선생은 “ 아마 북한산이 없었다면 책이나 논문도 못 썼을 것 ” 이라고 회고할 정도다 . 선생의 북한산 사랑은 실로 지극하다 . 자녀들에게 “ 죽고 나서 이 집을 얼마에 팔든 , 북한산 위에 떠 있는 달 값은 1 억 받아라 ” 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 이 글을 읽으니 지난 5 월 23 일 이곳 2 차 방문 시 리빙프라자 4 층 한식당에서 복분자술을 곁들인 점심 식사 중 “ 내가 ( 송 교수 ) 죽으면 북한산 백운대가 직통으로 잘 보이는 옛날 집터 ( 뉴타운 조성 시 공원으로 됨 ) 에 밤에 몰래 내 유골을 묻어 달 라 ” 고 자녀분에게 당부하겠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 나는 글을 쓰면서 송복 교수의 글을 도둑질해서 많이 옮겨 썼다 . 어머니가 없는 고향은 고향도 아니라는 송복 교수의 사 모곡 ( 思母曲 ), 우리 독립운동의 의 ( 義 ) 와 효 ( 效 ) 등이다 . 우리는 만년에 이렇게 책으로 편지로 소통하면서 , 반세기를 교우 해 왔다 . 우리의 만남은 50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1975 년으로 기억된다 . 연세대학교 통근버스가 불광동 연신내를 종점으로 다니던 시절 , 연신내 주변에 살던 교수들이 구공탄 불에 곱창을 구워 먹던 패거리가 있었다 . 퇴근 버스가 연신내에 도착하면 말없이 연신내 뒷골목으로 사라진 일파 이다 . 나는 당시 장희빈 친정묘지의 입구 , 연신내 깊은 골짜기의 후미진 곳에 살고 있었다 . 일차는 구공탄 불에 곱창과 소 주 , 2 차는 카페에서 맥주 , 3 차는 친구 같은 마담이 있는 다방에서 노닥거렸다 . 이 모임이 잦아지자 ‘ 연신학파 ’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의 주 ( 主 ) 를 섬기는 진짜 연신학파와 주 ( 酒 ) 를 섬기는 가짜 연신학파가 불경스럽게도 연신학파라 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었다 . 우리의 두목은 기자촌에 사는 송복 교수였다 . 술을 좋아하고 , 호탕하고 , 보수 논객으로 독보적 인 명성을 차지한 그가 우리 연신학파의 두목으로 대접받은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 송복 두목이 있으므로 연신학파가 진 짜 학파인 양 착각할 때도 있었다 . 2007 년 송복 교수의 역작 ‘ 위대한 만남 서애 류성룡 ’ 이 출판되었다 . 그리고 송복 교수의 해설을 들었다 . 송복 교수의 이 해설을 들은 직후 , 연신학파의 명칭을 「 송복학교 」 로 변경했다 . 우리는 학생이고 송복 교수는 교장이다 . 두 달에 한 번씩 인사동 이모집에 모여 송복 교장의 강의를 들었다 . 월사금 없이 듣는 강의는 ‘ 송복학교 ’ 의 진가를 한층 높여주었다 . 두 달 이 멀다 하고 기다려졌다 . 송복 교수는 50 년 동안 조선일보 , 동아일보 , 중앙일보에 칼럼을 써 , 보수 논객으로 명성을 높였다 . 지금은 송복 교수의 둘째 아들 송재윤 박사 ( 캐나다 맥마스터대학 교수 ) 가 조선일보에 칼럼을 싣고 있다 . 부전자전이다 . 2016 년에는 역시 송복 교수의 역작 ‘ 특혜와 책임 ’ 이 출판되었다 . 특혜만 누리고 책임은 지려 하지 않는 대한민국 특권 층의 민낯을 질타한 책이다 . 송복 교수는 책보다는 논문을 많이 썼다 . 저서 , 편저 , 역서와 별도로 1974 년부터 2022 년까지 80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 2022 년 이후도 ‘ 서애학회 ’ 에서 꾸준히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논문을 쓴 다는 것은 현역이다 . 논문을 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고 있는 미래지향형이다 . 일률적은 아니겠지만 현역 대학교수 시 절 논문 쓰느라 바빠서 책 쓸 생각을 못 한다 . 퇴임하고 나서 책 쓸 생각을 해본다 . 논문이 집대성되어 책이 되어야 한다 . 그 래서 책을 쓰는 것은 퇴역시대이고 , 과거지향 형이다 . 송복 교수는 영원한 현역이다 . 교수로서 , 지식인으로서 , 그리고 사회학자로서 선생은 누군가 흉내 내거나 따라가기 힘든 자신만의 ‘ 장르 ’ 를 만들어 내 었다고 전상인 교수는 송복 교수를 평하고 있다 . (2025. 6. 10. 기 )주암칼럼 153 자원리싸이클링 제 34 권 제 5 호 , 2025 실버타운에서의 독서편력(5) - 계간지 “철학과 현실” - 연세대학교 오재현 명예교수 2025 년 6 월 하순 , 계간잡지 ‘ 철학과 현실 144 호 (2025 년 봄 )’ 가 우편 배달되었 다 . 봉투를 뜯고 이 잡지의 표지를 보자 정말 끈질긴 인연이로구나 , 잡지가 잘 안 팔리는 모양이지 ,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백세를 바라보는 공학도인 내가 이런 잡지를 구독할 일은 만무한 것이다 . 그럼 에도 이 잡지와는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 . 내가 존경하고 친애하는 연세대학교 송 복 교수가 이 잡지에 「 송복 자전적에세이 」 를 실어 나에게 보내왔기 때문이다 . 2021 년 봄 (128 호 ) 에 시작하여 2022 년 겨울 (135 호 ) 까지 8 권의 ‘ 철학과 현실 ’ 을 보내왔다 . 나는 8 회에 걸쳐 이 잡지에 실린 송복 교수의 ‘ 송복 자전적에세이 ’ 를 열심히 또 재미있게 읽었다 . 출생에서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이야기를 담은 것인데 이 중 에서도 내 머리에 깊게 각인되어 감동한 것은 송복 교수의 ‘ 사모곡 ( 思母曲 )’ 과 , 독 립운동의 의 ( 義 ) 와 효 ( 效 ) 에 관한 기술이다 . 두 주제에 관한 송복 교수의 기술을 많이 축소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송복 교수의 사모곡 ( 思母曲 ) 「중학교 시절 왜 나는 매주 12km의 오솔길을 걷고 400m 고도의 불티재 고개를, 그것도 학기마다 3년, 한주도 거르지 않 고 그 고개를 넘어가고 넘어왔을까, 어머니가 그리워서였다. 고향은 아버지도 삼촌도 형제도 이웃도 아니고 어머니였다. 어 머니가 밀양 외갓집에 간 그날 저녁,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밤새껏 울었다.」 어머니 가 없는 고향은 고향이 아니라고 하였다. 독립운동의 의 ( 義 ) 와 효 ( 效 ) 「우리 독립운동의 목표는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는 것이다. 상해임시정부는 민족의 의( 義 )이며, 의기( 意氣 )로 뭉쳐진 집단이며, 형식적으로는 ’정부‘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효( 效 )‘가 없었다. 맨주먹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은 교육 이며, 외교이고,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한 분은 이승만이며, 김성수이다.」 이렇게 내 심금을 울린 글이 담긴 잡지 , ‘ 철학과 현실 ’ 을 계속 구독한다는 것은 아주 필연의 이치이다 . 그래서 2023 년 연초에 1 년 치의 구독료를 지불하고 구독신청을 하였다 .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 2023 년 겨울호의 잡지 ‘ 철학과 현실 ’ 이 배달되었다 . 그러나 어느 호에서도 송복 교수의 글은 볼 수 없었다 . 나는 송복 교수의 ‘ 자전적에세이 ’ 가 당연히 계속 연재 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큰 실망이었다 . 송복 교수의 글이 없는 이 잡지를 계속 구독할 이유가 없다 . 고로 2024 년도는 구독 신청을 하지 않았다 . 그런데도 잡지가 배달되었다 . 전화를 걸어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 그래도 또 잡지가 배달되었다 . 계간 의 날짜를 지키지 못하고 몇 달씩 지연되기도 하였다 . 직관적으로 이 잡지를 출판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감지하였다 . 나는 1990 년대 초 학회지 ‘ 자원리싸이클링 ’ 격월간 잡지를 출판한 경험이 있다 . 잡지가 내용이 풍부하고 출판날짜를 철학과 현실 144호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4, No. 5, 2025154 지키려면 출판자금과 원고가 많아야 한다 . 돈이 많으면 원고료를 많이 주어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회원의 회비로 운영되는 학회가 돈이 많이 있을 수 없다 . 그래서 잡지의 출판사업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 2024 년도는 미안하게도 구독료를 안 내고 , 잡지가 몇 권이나 배달되어 , 송복 교수의 글이 없는 것만 확인하였다 . 그래 서 잡지에 관한 관심이 멀어지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 그런데 뜻밖에도 금년 (2025) 6 월에 계간 ‘ 철학과 현실 ’ 144 호 (2025, 봄호 ) 가 또 배달되었다 . 무슨 인연인가 싶어 잡지를 뒤적거렸다 . 역시 송복 교수의 글은 없었다 . 그런데 편집후기의 ‘ 이명 현의 삶과 철학 ’ 이라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 아주 쉽게 , 재미있게 엮은 글로 단숨에 다 읽었다 . 물론 이명현이라는 이름도 , 글도 처음이다 . 2024 년 8 월 23 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현우 이명현 85 세수 축연 ( 玄愚 李明賢 八十五歲壽祝筵 ) 이 있 었다 . 그때 이 행사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글이다 . 이 행사는 ‘ 이명현의 삶과 철학 ’ 이라는 제목으로 이명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이사장으로 있는 ( 재 ) 심경문화재단이 주최하였다 . 그런데 실제로는 이번 행사는 「 철학과 현실 , 현실과 철학 」 시리즈 ( 젼 4 권 ) 저술에 참여한 한국의 철학자 74 인 이 이명현 교수의 학문적 업적을 되새기고 그의 사회적 기여를 재조명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 25 페이지라는 긴 편집후기는 축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 많은 축사 중에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병영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축사가 나를 흥분시켰다 . 축사 일부를 소개한다 . 「그분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철학과 현실의 접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없는 현실개혁은 무모하고, 현실 없는 철학은 공허합니다. 이 교수님은 이 둘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철학을 풍성하게 하고, 사회를 개선하는데 더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나는 이 축사를 읽고 묘한 심정에 잠겼다 . 불교가 자기 수양 위주의 종교처럼 철학은 자기의 내면세계를 사유하고 발전 시키는 순수학문으로 알고 있었다 . 철학 강의를 한 시간도 들은 적이 없는 공학도가 이렇군 . 저렇군 . 잡소리를 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 중학교 시절 ‘ 철학이전 ( 哲學以前 )’ 이라는 일본 책이 우리들간에 돌아다녔다 . 읽은 것 같은데 내용은 전연 기억할 수 없 다 . 80 여 년 전의 일이니까 . 이 책의 저자는 일본 교토대학 ( 京都大學 ) 의 유명한 철학과 교수이다 . 교토대학 철학과에는 두 분의 유명한 철학 교수가 있었다 . 한 분은 니시다 기타로 ( 西田幾多郞 , 1870∼1945) 로 기억나는데 또 한 분의 교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 책 “ 철학이전 ” 은 두 분 중 어느 교수의 저술인지 알지 못한다 . 하여튼 중학생 ( 일제시대 ) 의 교양서로 대 인기였다 . 여담이지만 그 당시 일본에서 도쿄대학 ( 東京大學 ) 이 모든 분야에서 최고였지만 , 철학과만은 교토대학이 더 유 명했다 . 이야기가 옆길로 흘렀다 . ‘ 철학과 현실의 접목 ’ 이라는 말이 , 철학이 사회현실에 참여한다는 것이 공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 공과대학 교수는 단골 술집이 있고 , 단골 회사 ( 생산기업체 ) 가 있어야 제격이라는 말이 있다 . ‘ 철학과 현실 144 호 ’ 에는 읽을거리가 많았다 . 이삼열 숭실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의 ‘ 철학과 현실참여의 사이에서 (3)’ 라는 글을 진지하게 읽었다 . 철학과 현실참여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과 고민을 담았다 . 이명현 명예교수의 삶과 철학의 연 장 선상의 글인 것 같았다 . 또 같은 호에 실린 김도식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의 「 다시 ‘ 우리 ’ 로 」 라는 철학에세이는 나에 게 새로운 지식 , 새로운 사고를 심어주었다 . 「탄핵을 찬성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옹호하는 정치인이 비슷한 상황에서 계엄을 선포했을 때도 탄핵을 주장할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반대로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은,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인이 유사한 경우에 계엄을 선포했을 때도 여전 히 탄핵을 반대할 것인지 스스로에 물어보라는 것이다. 만일 행위의 주체가 달라졌을 때 내 입장이 달라진다면, 이는 보편성 을 결여한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며, 이는 ‘나’의 울타리를 ‘우리’로 확장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우리는 이념과 갈등으로 양분되어 통합된 우리로 살기보다는 적대적 관계의 ‘너’와 ‘나’를 구분하며 살고 있다. 중략……. 밤낮 이주암칼럼 155 자원리싸이클링 제 34 권 제 5 호 , 2025 권 싸움에 여념이 없는 정치인들에게 상생의 윤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나, 나라를 걱정하는 지식인들이 ‘나’로부터 다시 ‘우리’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위의 김도식 교수의 글은 정말 신선하였다 . 나는 이 잡지에서 ‘ 돌짝밭에서 진달래 꽃이 피다 ’ 라는 현우 이명현 자서전 의 광고를 보고 서둘러 구독하였다 . 177 페이지의 비교적 짧은 글에 현우 이명현 교수의 생애를 간결하게 담았다 . 활자도 크고 , 줄 간도 넓어 초고령자도 읽는데 편리하였다 . 그것보다도 대가답게 글을 쉽게 쓰셨다 . 쉽게 쓴 굴이 좋은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자기밖에 모르는 어려운 글을 쓰는 대학교수가 있어서 신문기자가 대학교수를 우습게 안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 우수한 현장 기술자가 공과대학 교수를 우습게 보는 거와 마찬가지다 . 나는 이 이명현 교수의 자서전을 단숨에 다 읽었다 . 모든 장이 감동적이었으나 , 심경문화재단 , ≪ 철학과 현실 ≫, 그리 고 김태길 교수라는 제목의 33 장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 그것은 내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계간지 ‘ 철학과 현실 ’ 의 발행 인 및 발행처를 깨끗이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김태길 교수의 명성은 알고 있었다 .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저서 「 백 년을 살아보니 」 에서 우리나라 철학계의 삼총사로 연세대학교 김형석 교수 , 숭실대학교 철학과의 안병욱 교수와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김태길 교수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 계간 ‘ 철학과 현실 ’ 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그 줄거리 는 다음과 같다 . 1985 년 김태길 교수가 서울대학교 정년퇴임 1 년을 앞두고 앞으로 할 일을 이명현 교수와 상의했다 . 김태길 교수는 당 시 사당동 총신대학교 앞에 100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 그 당시 시가로 1 억 원쯤 되었다 . 이 땅을 팔아 법원 근처 땅 100 평을 사는데 황경식 교수 부인의 도움을 받았다 . 김태길 교수의 지분은 40 평이었다 . 100 평 위에 4 층 건물을 짓고 그 임 대료로 1990 년부터 계간잡지 발행을 시작했다 . 발행인 김태길 , 편집인 이명현으로 정부에 등록했다 . 2024 년 봄호가 나와 ≪ 철학과 현실 ≫ 140 호가 출판되었다 . 햇수로는 만 34 년이 되었다 . 최초 발행인 김태길 교수께서 2009 년 5 월에 89 세로 별세하심에 따라 2009 년 9 월부터 이명현이 발행인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재단의 설립은 서초동에 지은 4 층 건물을 토대로 하여 1992 년에 설립되었다 . ‘ 심경문화재단 ’ 의 1 억 원 기금의 원천은 김태길 교수께서 쓰신 「 인간회복의 서장 」 이 수상한 100 만 원의 상금이었다 . 그의 조카들이 이천에 땅을 사서 과수원농장 을 만들 적에 상금 100 만 원으로 1 만 평의 땅을 사서 과수원을 함께 경영했다 . 과수원을 경영한 지 20 년이 되었을 때 과수 원의 땅 전체를 팔았는데 , 김 교수의 1 만 평 과수원이 1 억 원에 팔렸다 . 그 과수원을 판 1 억 원으로 사당동 총신대학교 입 구 근처에 100 평의 땅을 매입했던 것이다 . 그리고 그 1 억 원이 오늘날 ‘ 심경문화재단 ’ 의 기금인 동시에 계간지 ≪ 철학과 현실 ≫ 의 종잣돈이 되었다 . 이제 계간지 ≪ 철학과 현실 ≫ 의 모든 것을 , 진가를 알았다 . 망설일 일이 아니다 . 송복 교수의 글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 내일모레에는 사무실에 가서 민지원 실장에게 2025 년 잡지구독료 6 만 원의 송금을 부탁할 것이다 . (2025. 6. 28. 기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