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춘계학술대회 안내 Resources Recycling Vol. 30, No. 2, 202182 ◎ 유탑마리나 호텔&리조트 2층 : 마린시티홀 - 특별세션 : Off grade Ti 스크랩의 일 100kg 이상 탈산정련에 의한 4N5급 잉곳 및 분말기술 활용 제품화 공 정기술 개발 No.발표시간발표제목(* 발표자) T-113:00-13:15 타이타늄계 스크랩으로부터 유/무기 불순물 제거 및 분말 제조 기술 개발 *이지은, 이찬기, 윤진호(고등기술연구원) T-213:15-13:30 마그네슘을 이용한 혼합 수소분위기 내 오프그레이드 타이타늄 스폰지의 탈산공정 개발 *강정신, 이태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임경환, 이경우(서울대학교) T-313:30-13:45 Mg에 의한 Off-grade Ti 탈산에 미치는 YCl 3 및 수소의 영향 *이소영, 정재헌, 박성훈, 손호상(경북대학교) T-413:45-14:00 타이타늄 전해 및 전자빔용해공정을 활용한 탈산재활용 기술 *박경태, 권남훈, 김현철, 변종수, 이용관, 서석준(한국생산기술연구원) T-514:00-14:15 MgCl 4 를 이용한 타이타늄 스크랩의 전해탈산 기초연구 *고의준, 하미드, 박찬웅, 신기승, 김정한(한밭대학교), 박경태(한국생산기술연구원) T-614:15-14:30 Scrap Ti를 이용한 베타 타이타늄 합금개발과 물성 평가 *이동근, 황효운, 강민수, 조평석(순천대학교) T-714:30-14:45 Off-grade Ti를 활용한 타이타늄 소재 개발 *박지환, 이형민, 강민, 강지영, 권혁곤, 장지훈((주)MTIG) T-814:45-15:00 타이타늄(분말)의 산소농도 측정 소급성 확보 방안에 관한 연구 *문기웅, 김태원, 조대형(한국산업기술시험원) 15:00-15:30휴 식 - 특별세션 : 전략 금속 동소재의 고품위 소재화를 위한 친환경 일관공정기술 개발 No.발표시간발표제목(* 발표자) C-115:30-15:45 친환경 동제련 기술로 제조된 전기동으로부터 본딩와이어용 5N급 이상의 고순도 동소재 제조 기술 *서영명, 이기웅, 윤호상, 김인태, 성현진, 안효진, 임윤택(성일하이메탈(주)) C-215:45-16:00 SOx 가스 미발생형 친환경・저에너지 동 제련법 개발 *강정신, 이태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C-316:00-16:15 진공용해 공정변수가 본딩와이어용 Cu rod의 순도에 미치는 영향 *이지운, 조훈, 조창희, 최신영, 김원용(한국생산기술연), 이석연, 문정탁(엠케이전자(주)) C-416:15-16:30 반도체 패키징용 구리 극세선 와이어 *이석연, 문정탁, 조몽현, 정병훈, 심규민(엠케이전자), 권기범, 이상학(시그네틱스) C-516:30-16:45 Zr 첨가에 따른 동철 합금의 액상분리 거동 제어 *문호준, 조중욱(포항공대 철강대학원) C-616:45-17:00 자동차 신호 케이블용 구리 합금 선재 개발 *이삼순, 권대희, 안성도(키스트론(주)) C-717:00-17:15 투과전자현미경법을 이용한 고강도 고전도 구리 소재의 미세구조 특성에 관한 연구 *김세웅, 이병헌, 임성환(강원대학교), 최은애, 한승전(한국재료연구원) C-817:15-17:30 DFT 계산 기반 고강도 고내마모성 동합금 개발 *최은애, 한승전, 안지혁(한국재료연구원), 임성환(강원대학교)학회 소식 83 자원리싸이클링 제 30 권 제 2 호 , 2021 2021 년도 제 2 차 편집간사회 회의록 ( 제 14 대 편집위원회 제 2 차 회의 ) ○ 일 시 : 2021 년 4 월 26 일 ( 월 ) 17 시 -18 시 / 온라인회의 보고 1. 2021 년도 제 1 차 편집위원회 회의록 보고 - 만장 이의없이 승인함 보고 2. 제 30 권 1 호를 총 11 편 ( 총설 3 편 , 연구논문 7 편 , 기술보문 1 편 ) 으로 발간함 . ≪ 심의안건≫ 심의안건 1. 학회지 제 30 권 2 호 발간의 건 - 현재까지 완료된 원고 총 9 편 ( 총설 1 편 , 연구논문 8 편 ) 을 게재하기로 함 . -2021 년 춘계학술대회 프로그램 , 제 2 차 편집간사회 회의록 , 회원동정 , 주암칼럼 등 게재예정 심의안건 2. 학회지 논문 심사현황 검토 및 활성화 방안 논의 -2021 년 현재 (4, 21.) 까지 총 16 편의 원고가 접수되었고 , 현재 심사 및 저자수정이 진행중인 원고는 총 6 편임 . - 논문투고가 필요한 상황으로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학술지 재평가 등을 위해 게재율관리도 필요 . 편집위원회에서 는 지속적인 논문현황파악 및 투고독려 등에 열심히 참여하기로 함 . -2021 년부터는 온라인논문투고시스템 : http://submission.j-kirr.or.kr/ 으로 모든 논문을 관리하기에 급행논문 또 는 학술대회 발표원고의 투고 등에 대해서도 편집간사님들이 체계적인 진행이 이루어 지도록 관리하기로 함 . - 논문투고가 부족하다보니 , 열심히 투고해주시는 2-3 분의 논문이 계속 중복 게재되는 경우 발생하고 있음 . 학회지 한 호에는 동일한 투고자의 논문이 여러편 게재되지 않도록 논문게재를 관리하기로 함 심의안건 3. 학회지 특집호 발간 논의 -Recycling Korea 2021 Yeosu -2021 년 춘계임시총회 및 제 54 회 학술발표대회의 바나듐 관련 발표논문으로 특별 호 발간 (30 권 4 호 ) 을 계획하고 시일에 맞춰 진행하기로 함 . 심의안건 4. 기타토의 (1) 논문 게재율 제고 방안 논의 - 해외학술지 (SCI, SCIE, SCOPUS 등 ) 에 게재할 논문에 당 학회지를 참고문헌으로 활용하는 내용에 대해 홍보 및 협조진행필요 .( 최근 2 년 당 학회지 논문 ) - 해외과학자 ( 동아시아 등 ) 의 훌륭한 논문이 학회지에 투고될 수 있도록 홍보 및 유치 방안에 대해 검토하고 투고자 섭외 및 원고료 지출에 대해 검토 후 진행하기로 함 .회원 동정 Resources Recycling Vol. 30, No. 2, 202184 【 신입회원명단 】 2021 년 2 월 21 일 부터 2021 년 4 월 20 일까지 입회하신 회원입니다 . 성명출신교 ∙ 학위입회일자근 무 처비고 문정이 고려대 ( 학사 ) 기타큐슈시립대 ( 석사 , 박사 ) 2021. 3. 9. Sumitomo Metal Mining, Niihama Research Lab 연구원 17-5 Isoura-cho, Niihama City, Ehime Prefecture, Japan jeongyia@gmail.com 종신 223 임창굉인하대 ( 학사 )2021. 2. 26. 서울 중랑구 숙선옹주로 9 길 25, 세방아파트 102 동 1206 호 changgueng@naver.com 정 1100 정문근 서울대 ( 학사 ) The Univ. of Sydney ( 박사 ) 2021. 3. 19. 한국화학연구원 그린탄소연구센터 책임연구원 대전시 유성구 가정로 141 mgjung@krict.re.kr 정 1101 신학기부산대 ( 박사 )2021. 3. 22. ( 주 )GMS21 기술고문 부산시 사하구 보덕포 1 길 119 nsgms@gms21.com 정 1102 이환희가천의대 ( 학사 )2021. 3. 26. 대보마그네틱 홍보부 이사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현대기아로 25-13 hhlee0811@gmail.com 정 1103 김지열서경대 ( 학사 )2021. 4. 19. 정석리파인 부석연구소 소장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산길 130-41 master@jsrefine.co.kr 정 1104 김석현 2021. 3. 24. 목포대학교 신소재공학과 학부생 전남 무안군 청계면 영산로 1666, 제 5 공학관 606 호 ajfqhk15@daum.net 준 205 문승현목포대 ( 학사 )2021. 3. 24. 목포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석사과정 전남 무안군 청계면 영산로 1666, 제 5 공학관 606 호 pc0125@naver.com 준 206 Nguyen Thi Thu Huong Can Tho Univ. ( 학사 , 석사 ) 2021. 3. 24. 목포대학교 신소재시스템공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전남 무안군 청계면 영산로 1666, 제 5 공학관 606 호 ntthuhuong@ctu.edu.vn 준 207 Nguyen Viet Nhan Hoa Can Tho Univ. ( 학사 , 석사 ) 2021. 3. 24. 목포대학교 신소재시스템공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전남 무안군 청계면 영산로 1666, 제 5 공학관 606 호 hoahoa.tg@gmail.com 준 208 Tran Thanh Tuan Can Tho Univ. ( 학사 , 석사 ) 2021. 3. 24. 목포대학교 신소재시스템공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전남 무안군 청계면 영산로 1666, 제 5 공학관 606 호 tttuan32@gmail.com 준 209 이기환 2021. 3. 17. 동아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졸업생 부산시 사하구 낙동대로 550 번길 37 donga0521@naver.com 준 210 장민혁한밭대 ( 학사 )2021. 3. 30. 한밭대학교 석사과정 대전시 유성구 동서대로 125, N6 동 204 호 minhyeok0821@naver.com 준 211 김수빈경북대 ( 학사 )2021. 4. 2. 경북대학교 금속신소재공학 석사과정 대구시 북구 대학로 80, 재료화학공정연구실 404 호 mmilk2007@naver.com 준 212 【 회원 소식 】 “ 당 학회 종신회원인 김미성 박사 , 국제표준작업 IEC T 120 컨비너 활동 ” 최근 한국이 국제전기기술위원회 (IEC) 에 제안한 ‘ESS 시스템 안전시험방법 및 절차 (IEC 62933-5-3)’ 가 ESS 시스템 기술위원회 (IEC-TC 120) 에서 신규작업표준안 (NP) 으 로 채택되는 등 한국이 ESS 분야의 국제 표준 시장을 이끌고 있다 . IEC 내에서 ESS 분야 를 다루는 TC 120 내 ESS 환경안전을 다루는 워킹그룹 (WG) 4 의 리더로 김미성 수석연 구원 (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 , 사진 ) 이 활동하고 있다 .주암칼럼 85 자원리싸이클링 제 30 권 제 2 호 , 2021 삼성노블카운티의 도서실과 도서관(3) ― 일본 역사소설가, 시바요타로(司馬遼太郎) ― 연세대학교 오재현 명예교수 한국과 관련이 있는 시바료타로의 작품 중에 탐라기행 ( 耽羅紀行 ) 이 있다 . 1986 년에 간행한 시리즈 “ 가도를 가다 28” 이 다 . 탐라는 제주도이다 . 나는 이 책을 리빙프라자 2 층에 있는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다시 읽었다 . 옛날에 읽었던 기억이 전 연 없다 . 이 책이 출판되어 35 년이 지났다 . 司馬는 1985 년 늦가을에 일행과 같이 제주도를 방문하였다 . 일행 중에는 제주도 출신 의 재일교포 작가 , 학자도 있었다 . 그들은 제주도의 변화된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 씁쓸한 감정을 겨우 달랬다 . 그들이 자 랐던 농촌 ( 양촌 ) 은 빈틈없이 귤 밭으로 바뀌었다 . 그들이 현재의 제주도를 본다면 옛날 (35 년 전 ) 의 변화는 극히 초보적임 을 알게 될 것이다 . 나는 근년 비교적 자주 제주도에 다녔다 . 갈 때마다 새로운 볼거리가 생기고 있다 . 또 옛날에 놓쳤던 명소를 찾아 감동 을 받기도 한다 . 하와이와 비교해서 훨씬 많은 관광의 장점과 명소를 가지고 있다 . 시바 ( 司馬 ) 가 이 책에서 기술한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를 연계하여 제주도를 탐방한다면 제주도 여행의 가치가 일단 높 아질 것이다 . 제주도는 고대 , 탐라 ( 耽羅 ) 라는 독립국이었다 . 고대의 탐라는 언어와 풍속에 있어서 독특한 독립성을 가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구체적으로는 알 길이 없다 . 독립국인 탐라가 조선반도의 왕국과 처음으로 공식적인 접촉을 가진 것은 5 세기말 476 년 , 백제의 문주왕 ( 文周王 ) 2 년 으로 알려져 있다 . 탐라는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 백제의 힘이 약해지자 신라 ( 新羅 ) 의 세력 하에 놓였다 . 고려조 의 말기 (1291 년 ) 에는 일개 행정구가 되고 , 이름도 ‘ 제주 ’ 로 개칭되었다 . 그리고 이조 ( 李朝 ) 때는 완전히 이조문화권으로 변 색되었다 . 그뿐 아니라 이조 때는 초기부터 당쟁 ( 黨爭 ) 의 조짐이 있었고 연달아 사화 ( 士禍 ) 가 발생하여 고관과 유자 ( 儒者 ) 가 처형 혹은 유배 ( 流配 ) 되었다 . 유배지는 제주도였다 . 「 제주도 류인 ( 流人 ) 전 」( 金奉鉉 저 , 國書刊會 ) 이란 훌륭한 연구서가 있을 정도로 유배인의 수가 많았다 . 거의가 중앙 의 관료 , 지식인이었으므로 , 제주도 측에서 보면 , 소위 우생학 ( 優生學 ) 의 실험장같이 되었다 . 제주도는 수재가 많고 미 인이 많다고 하는데 , 이조 ( 李朝 ) 의 만성병이 라고 할 수 있는 당화 ( 黨禍 ) 의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씨조선 ( 李氏朝鮮 ) 은 , 유학 중에서도 이 념성이 가장 강한 주자학 ( 朱子學 ) 을 관학 ( 官 學 ) 으로 삼아 , 타의 시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 주자학 이외의 사상을 가진 선비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탄압하였다 . 그래서 조선의 근대화 준비가 결정적으로 지연되었으며 , 그 약점을 노려 근대화가 빨랐던 일본이 조선을 통째로 삼켰다고 司馬는 서술하고 있다 . 1985 년 10 월 27 일 司馬일행은 大阪空港에 서 KAL 기로 제주에 왔다 . 일행 중에는 재일 교포인 강재언 ( 姜在彦 ) 씨 부부 , 현문숙 ( 玄文 제주도 옛날지도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0, No. 2, 202186 叔 ) 씨 부부 그리고 강재언씨 대학 후배인 장준석 ( 張準錫 ) 씨 부부가 있었다 . 장준석씨는 경상남도 출신이지만 부인이 서귀 포 출신으로 그곳에 부친이 건재하고 있다 . 6 명 중 5 명이 제주도 출신이다 . 이번 일행 중에는 포함 안 되었지만 이들과 늘 교우를 가진 제주도 출신 작가 몇 분이 이 책에 자주 등장한다 . 소설 「 火山島 ( 화산도 )」 전 3 권 ( 문예춘추 ) 으로 제 11 회 (1984 년 ) 大佛次郞賞 ( 오사나기지로 상 ) 을 받은 김석범 ( 金石範 ) 씨도 제주도 출신이다 . 현문숙씨가 경도에서 양서고서점 ( 갈바 ) 을 경영하고 있을 때 같은 경도대학 문학부 선후배라는 인연으로 김석범씨는 이 양서고서점에 와 주인대신 자주 주인노릇도 하였다 . 1984 년 10 월 12 일 발행의 「 週刊朝日 ( 주간 아사히 )」 에 橫山政男 ( 요 코야마 마시오 ) 씨가 김석범씨의 사람과 작품에 관한 따뜻한 글을 썼다 . 司馬는 그 문장의 다음과 같은 말미가 감동적이었 다고 말하고 있다 . 「 金石範씨가 朝日新聞社로부터 大佛賞의 소식을 듣고 川口市 ( 가와구찌시 ) 의 자택에서 자전거를 타고 西川口驛 ( 니시가 와꾸지역 ) 전의 단골선술집에 혼자 축배를 들기 위해 갔었다 . 취기가 돌자 기쁨과 동시에 맹렬한 분노가 치밀어 왔다 . 분노 가 또 술을 마시게 하였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전거로부터 전도 ( 轉倒 ) 되어 망가진 안경테로 눈가에 깊은 상처를 입었 다 .」 司馬가 후일 김석범씨를 만났을 때 , 그때의 그 분노가 어떤 분노였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고 하면서 입을 닫았다 . 司馬 일행 중에 강재언 ( 姜在彦 ) 씨 부부도 포함됨을 전술하였다 . 강재언씨가 대학원 학생 ( 京都大 ) 일 때 참고문헌을 찾기 위하여 그 목록을 들고 현문숙씨의 양서고서점 ( 갈바 ) 에 찾아 갔다 . 우연의 만남이었지만 같은 제주도 출신이다 . 이를 계기 로 두 분은 40 여 년간 형제같이 지내고 있다 . 한편 , 司馬가 강재언씨를 알게 된 것은 강재언씨가 「 해유록 ( 海遊錄 )」 을 일본 말로 번역한 것이 平凡社 ( 평범사 ) 의 동양문고로 출판되었기 때문이었다 . 「 해유록 」 의 필자는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서 에 도 ( 江戶 ) 중기인 1719 년 일본에 와 그 실정을 자세히 관찰해서 기록한 신유한 ( 申維翰 ) 이다 . 훌륭한 여행기로서 몇 번을 읽 어도 그때마다 새로운 발견이 있다는 책이다 . 그리고 강재언씨의 번역솜씨가 또 감탄할 만큼 훌륭하였다 . 강재언씨의 일 본말로 된 학문적인 연구업적을 아래에 열거하였다 . ≪ 조선 근대사 연구 , ( 일본평론사 )≫, ≪ 근대조선의 변혁사상 , ( 일본평론사 )≫ ≪ 조선의 양이와 개화 , ( 평범사 )≫, ≪ 조선의 개화사상 , ( 이와나미서점 )≫, ≪ 조선 근대사 , ( 평범사 )≫ “ 조선의 개화사상 ” 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경도대학 문학부 ( 京都大學 文學部 ) 에서 문학박사 학위로 선정되어 본 인에게 수여되었다 . 강재언씨는 아주 드물게 보는 애국자이다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갈라진 판국에 , 애국자라는 것은 고독일 수밖에 없다 . 그렇다고 완전한 고독은 아니다 . 그는 칼날 위를 건너가는 것과 같은 어려운 입장을 지키기 위하여 몇 분의 동포친구를 가지고 있다 . 작가의 김달수 ( 金達壽 ) 씨 같은 분이다 . 위와 같이 司馬는 강재언씨를 평하고 있다 . 일행 중 현문숙씨 부부가 있다 . 司馬부인과 현문숙씨 부인인 文順 礼 씨는 국민학교때 친구였다 . 6 년 전 大阪城 내에 있는 시립박물관에서 한국 출토문물의 전시가 있었다 . 그때 어릴 때 친구였던 두 분이 37 년 만에 극적으로 만났다 . 文順 礼 씨는 남편 현문숙을 司馬에게 소개하였다 . 자연스럽게 강재언씨의 이름이 나왔다 . ‘ 오래된 친구입니다 .’ 현문숙씨가 말했다 . 이 로 인하여 , 서로 초대면의 긴장이 풀렸다고 한다 . 司馬는 조선의 정치사상과 사건들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피하였다 . 특히 제주도와 관련이 있는 사항은 제주도 출신 작 가의 저술 ( 소설 ) 을 소개하는 식이었다 . 제주도 현대사에서 대량의 죽음 (8 만 명 이상이라고 알려짐 ) 의 정치사변 즉 , 4.3. 사 건 (1948) 에 관해서도 일본말로 된 「 제주도 피의역사 ( 김봉현 저 , 도서간행회 )」, 「 화산도 ( 김석범 저 , 문예춘추 ) 3 권 」 를 소 개만 하고 있다 . 외국인으로서 절도를 지키기 때문이다 . 제주도이야기는 한라산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 한라산은 제주도의 심벌이고 신이다 .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라가 보지 않 고는 보석 같은 제주도 경관의 진가를 말할 자격이 없다 . 중국 상하이 ( 上海 ) 로 가는 여객기는 제주도 상공을 지나간다 . 맑주암칼럼 87 자원리싸이클링 제 30 권 제 2 호 , 2021 은 하늘위에서 고구마같은 모양의 제주도와 그 중앙에 솟은 한라산이 선명하게 조망된다 . 한라산 정상은 종 모양의 형태 ( 백록담 ) 를 하고 있지만 그 아래에는 완만한 경사로 고원을 형성하고 있다 . 그 먼 옛날 백록담의 대분출로 용암이 흘러 흘 러 제주도를 형성하였다 . 다음의 시는 나의 자작시로 제주도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 서귀포 깎아 세운 듯 한 서귀포 언덕위에 기름진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해풍에 나부끼는 잎과 가지들 시원히 흔들리는 오솔길이 마음 달랜다. 용암이 흘러 흘러 여기 머물러 섬과 산과 절벽을 이루고 백록담 대분출의 먼 그 옛날을 수정같은 바닷물과 얼마나 속삭였을까. 여인저고리 소매처럼 부드러운 한라산 능선에 포근한 엄마와 누나의 정이 가득한데 하늘과 바다가 이어지는 막막한 대양 출렁이는 파도소리에 가슴 적신다. (1993. 7. 23. 서귀포 프린스호텔에서)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해촌 ( 해발 0m, 수산물 생산 ), 양촌 ( 해발 2~200m, 농업을 경작케하고 , 귤밭이기도 하다 .), 산촌 ( 해발 200~600m, 목초지로 소와 말을 사육 ) 으로 구분할 수 있다 . 목초지는 광대하고 수평선이 보기 어렵도록 대초원 이다 . 표고 1,400m 까지는 온대림으로 , 너도밤나무 , 졸참나무 , 칠엽수 , 상수리나무 , 산벗꽃나무가 번성하며 원시림에 가깝 다 . 1,700m 까지는 한대림으로 고산식물의 세계이다 . 1360 년대 , 元나라가 쇠망함에 중국령 내에 있는 몽골인은 말을 타고 유유히 본국으로 돌아갔다 . 그런데 제주도의 몽골 병은 제주도에 토착하였다 . 바다를 건너 돌아가기가 힘들기도 하였지만 한라산 초원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 몽골인 은 제주도 도민과 혼종이 되어 그 자손을 찾을 수 없다 . 찾을 수 있는 것은 몽골말뿐이다 . 몽골말은 아랍과 중국서역에 있는 말과는 달리 마격 ( 馬格 ) 이 크지 않다 . 체격은 작은데 머리만 크고 , 다리가 굵고 짧다 . 그래서 장도의 행군에 적격이며 , 내구력이 강하다 . 칭기즈칸 ( 成吉思汗 ) 과 그의 자손들은 이 조그만 말을 타고 그 먼 유럽까 지 갔다 . 13 세기대의 몽골제국의 말은 제주도에만 남아 있다 . 이것이 몽골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 고려조는 몽골인이 세운 원 ( 元 ) 나라에 의해서 시달렸다 . 국토를 롤러로 밀어 몇 번이고 왕복하는 식이었다 . 그래서 고 려조는 元나라에 90 년간 신종 ( 臣從 ) 하였다 . 최후의 저항군인 삼별초 ( 三別抄 ) 가 제주도에서 전멸 (1273 년 ) 되었을 때 , 元나 라는 제주도를 고려로부터 분리하여 직할령으로 삼았다 . 그때 쿠빌라이는 몽골 기마병 1700 명을 파견하였다 . 이 기마병 은 한라산 초원에 말을 방목하여 초원생활을 즐겼다 . 司馬가 제주도에 관해서 공부하고 조사하는데 명저 「 제주도 」( 동경대학출판회 , 1966) 가 많은 보탬을 주었다 . 제주도에 관한 저자 중에서 이 책만이 오직 일본인이다 . 저자 이즈미 세이이찌 ( 泉靖一 ) 박사는 1915 년 동경에서 태어나고 , 8.15 해 방 전 경성제국대학 ( 지금의 서울대학교 )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하였다 . 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0, No. 2, 202188 이즈미 세이이찌씨가 제주도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35 년이었다 . 대학의 여름방학을 이용한 여행이었다 . 수 주간 도내를 구석구석까지 보고 다녔다 . 이때 그는 겨울철의 한라산이야기를 들었다 . 눈이 많아 정상까지 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 이말에 자극되었다 . 그는 산악부원이었다 . 이해 겨울이 오고 , 1936 년 설날 친구들과 목적한대로 한라산 정상에 도달 했다 . 정상부근에서 수일간 보냈다 . 이때 동행한 친구 마에카와 지하루 ( 前川智春 ) 을 일었다 . 이 조난이 계기가 되어 전공을 문화인류학으로 바꿨다 . 제주도가 한분의 학자 마음속에 학문적인 회심을 움트게 한 것이다 . 泉 ( 이즈미 ) 씨는 1936 년부터 다음해까지 신들린 사람처럼 제주도의 마을과 마을을 걸어 다녔다 . 저서 「 제주도 」 의 핵심 부인 제 1 부 ‘ 제주도 민속지 ’ 의 기술은 그때의 자료로 이루어진 것이다 . 1930 년대의 제주도의 문화인류학적 관찰은 실로 귀중한 것으로 남아 있다 . 그 후 泉씨는 패전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 패전 후에도 泉씨는 제주도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지 않았다 . ‘ 제주도는 나의 학문의 고향이다 ’ 라고 말하곤 하였다 . 泉靖一 교수는 東京大學에서 문화인류학 연구를 한층 높여 놓은 분이지만 그 학문의 기초는 제주도의 풍토가 두텁게 깔려 있다 . 1965 년 泉교수는 관광단체의 일원으로 한국에 와 학우 김택규 ( 金宅圭 ) 씨와 같이 제주도로 행하였다 . 제주대학교 현용 준 ( 玄容駿 ) 교수가 두분을 안내하였다 . 玄교수는 제주대학교를 졸업하고 東京大學 大學院에서 「 제주도의 무속 」 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다 . 「 제주도 」 의 제 3 부 ‘ 제주도에 있어서 30 년 ’ 은 이 재방 ( 再訪 ) 때의 수확이다 . 이 장에서 ‘30 년 ’ 은 최초의 제주도 야외조사 연구로부터 30 년이 경과하였다는 의미로 변용 ( 變容 ) 이 주제로 되어 있다 . 가장 큰 변용은 1945 년 8 월 조선의 해방이다 . 그 로부터 3 년이 경과한 1948 년 4 월 3 일 제주도에 폭동이 일어났다 . 이일을 泉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4.3 사건으로 알려진 제주도의 무서운 비극은 ,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진보주의자와 그 당시의 경찰 서장 및 경관의 다수 그리고 마을의 깡패 및 서북청년대와의 대립으로 시작되었으며 , 공산당의 지도에 의한 것은 아니었 다 . 그리고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강한 지방주의가 전 도민을 부추겨 , 도 출신의 진보주의자를 지지함으로서 일어난 것이다 .」 泉교수는 제주도의 해녀 ( 海女 ) 와 무당에 관해서도 많은 기술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 泉교수 는 이 명저 「 제주도 」 출판 4 년 후 1970 년 애석하게도 유명을 달리하였다 . 東京大學 교수로 현직에 있었으며 , 55 세였다 . (2021 년 1 월 14 일 기 )주암칼럼 89 자원리싸이클링 제 30 권 제 2 호 , 2021 삼성노블카운티의 도서실과 도서관(4) ― 일본 역사소설가, 시바요타로(司馬遼太郎) ― 연세대학교 오재현 명예교수 시바료타로의 탐라기행 ( 耽羅紀行 ) 에는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가 기술되어 있을 뿐 아니라 , 이씨 조선 500 년의 정치사상 도 언급하고 있다 . 나는 평소에 조선이 어떻게 하여 망하였는가가 궁금하였는데 탐라기행을 되풀이해서 읽고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 이조 ( 李朝 ) 는 1392 년에 시작하여 1910 년에 끝났다 . 518 년이라는 세계에서 아주 드물게 보는 장수왕국이었다 . 이조는 중국과 같이 과거 ( 科擧 ) 시험에 의해서 관리를 채용하였다 . 그 시험에는 주자학 ( 朱子學 ) 을 유일의 학파로 정하고 , 그 이외 의 사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 이 관행이 조선역사에 처참한 재화로 작용하였다 . 주자학은 고증 ( 考 証) 과 실증성 ( 實 証 性 ) 보 다도 대의명분 ( 大義名分 ) 을 중요시하고 그 찬반을 들어 끝없이 싸움하는 학파였던 것이다 . 세계가 근대사회를 바쁘게 구축하기 시작한 시기에 조선은 일관해서 비생산적인 주자학으로 소모하였다 . 정말 안타까 운 500 년이었다 . 이조의 정치사는 붕당 ( 朋黨 ) 의 대립과 그 당쟁 ( 黨爭 ) 과 탄압의 역사였다 . 논쟁의 핵심은 대의명분론이고 , 타당을 비난하는 것도 대의명분론인 것이다 . 연산군시대 무오사화 ( 戊午士禍 , 1498 년 ) 를 시작으로 갑자사화 , 기묘사화 등 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 그때마다 충신과 유자 ( 儒者 ) 가 처형되고 대량의 유배 ( 流配 ) 가 있었다 . 유배지는 주가 제주도였다 . 송시열 ( 宋時烈 ) 도 만년 제주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 송시열 (1607-1689) 은 대 유학자였고 대관 ( 大官 ) 이었다 . 노론파 ( 老論派 ) 의 영수로서 4 대의 왕 ( 인조 , 효종 , 현종 , 숙종 ) 을 모신 긴 정치생명을 가졌다 . 송시열은 주자학 이외 의 사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 주자에의 일편단심은 병적이었다 . 조선인은 여진 ( 女眞 ) 을 호 ( 胡 ) 라고 불렀다 . 야만인이다 . 조 선에서는 옛날부터 이 북방민족은 만인시하였다 . 주자학에 있어서는 ‘ 왕을 받들고 , 야만인을 추출 ’ 해야 한다 . 존왕양이 ( 尊王攘夷 ) 는 주자학의 큰 명제 ( 命題 ) 이다 . 왕은 중국황제 ( 中國皇帝 ) 이다 . 주자학에 있어서는 중화문명만이 올 바른 보편적인 가치이며 , 그 가치를 지키도록 하늘에서 임명한 오직 한사람이 중국황제인 것이다 . 중국황제와 조선국왕의 관계를 송시열은 군신 ( 君臣 ) 이고 부자관계라고 하였다 . 효종 ( 재위 1649-1659) 이 왕으로 즉위하였을 때 송시열은 격렬한 문장으로 왕의 임무는 정사를 바르게 하여 이적 ( 夷狄 , 청국 ) 을 치는 것이라고 알렸다 . 효종은 재위 10 년간 늘 북벌 ( 청을 치는 것 ) 을 생각하였다 . 그러나 청을 칠 수 있는 국력은 없었고 , 청에 신종 ( 臣從 ) 하였다 . 청의 황제를 조선국왕은 군부 ( 君父 ) 로 예의를 다하였다 . 물론 본심은 아니다 . 이 송시열의 주자사상은 조선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졌다 . 청에 대해서 머리를 깊이 숙이면서 내심은 청을 금수로 여기 고 경멸하는 사고가 근대까지 일관하여 이어졌다 . 우리세대는 나도 어릴 적에 ( 일제시대 ) 중국인 ( 청나라 사람 ) 을 ‘ 오랑캐 ’ 로 , 일본인을 ‘ 쪽발이 ’ 로 불렀다 .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조신인은 중국인 , 일본인 보다 항상 우위에 있는 냥 정신적으 로 행사하였다 . 만동묘는 숙종 때인 1703 년 노론 거두 송시열이 남긴 유언에 따라 그 제자 권상하가 충북 화양동 계곡에 만든 사당이 다 . 임진왜란 때 명군을 출병시킨 명나라 황제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을 제사 지내던 사당이다 . 만동 ( 萬東 ) 은 ‘ 만 절필동 ( 萬折必東 )’ 을 줄인 말이다 . 지역하면 ‘ 황하가 만 번 꺾어져도 동쪽으로 흐른다 ’ 는 뜻이다 . 속뜻은 ‘ 조선이 어찌됐든 상관없이 명나라를 섬기겠다 ’ 는 뜻이다 . 이 글은 박종인 저 ‘ 매국노 고종 ’, P.41 에서 따온 글이다 . 이씨조선은 엄중하게 쇄국체제를 굳히고 있었다 . 1840 년 영국과 청나라가 벌인 아편전쟁은 황제국 청의 ‘ 천하 ’ 를 무너 뜨린 일대 사건이었다 . 충격을 받은 일본지도부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문호를 개방하고 1868 년 서양식 근대화에 착수하 였다 . 조선지도부는 서양을 오랑캐로 배격하며 쇄국을 유지했다 . 에도기 ( 江戶期 ) 의 일본은 쇄국을 하면서도 나가사키 ( 長崎 ) 라는 창 ( 窓 ) 을 열고 , 네덜란드 및 중국 상인과 접촉하고 있었주암칼럼 Resources Recycling Vol. 30, No. 2, 202190 다 . 그것 뿐 아니라 막부 ( 幕府 ) 는 네덜란드인으로부터 세계 및 중국 정세에 관한 종합적인 보고를 정기적으로 받고 있었다 . 통칭 ‘ 네덜란드 풍문서 ’ 인 것이다 . 한편 , 조선은 창이란 창은 모두 닫고 있었다 . 에도기 ( 江戶期 ) 에 조선은 쓰시마한 ( 對馬 藩 ) 에 무역사무소 격인 왜관 ( 倭館 ) 을 부산에 두게 하였다 . 이 왜관에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 그러나 이씨조선은 이 일에 관심이 없었다 . 왜관에 주재한 쓰시마한시 ( 對馬藩士 ) 는 관외로 출타하는 것을 불허하였으며 , 관외의 일반인도 왜관에 접촉하는 것을 금하였다 . 이 점은 일본에 있어서의 나가사키 데지만 ( 長崎出島 ) 의 네덜란드 인과 많이 닮았다 . 다만 , 일본은 백이 넘는 통 역사집이 있어 이 통역하는 사람으로부터 네덜란드 말을 배우고 , 또 통역하는 사람을 통해서 네덜란드 인으로부터 의학 및 이화학을 배울 수 있었다 . 그리고 데지마의 네덜란드 인은 규정에 의하여 에도 ( 江戶 ) 를 참관 ( 參觀 ) 하였지만 , 부산의 왜 관에 거주하는 쓰시마한시는 서울로 가는 것을 불허하였다 . 17 세기 중엽 , 난파선에 의하여 네덜란드인이 조선과 접촉하게 된다 . 네덜란드 선이 1653 년 여름 제주도 대정현에서 좌 초하여 파선하였다 . 승무원이 64 명이었으나 파선 시 많은 사람이 죽고 36 명이 생존하였다 . 조선 관리는 그들에게 깊은 동 정심을 가진 자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 그들을 수도로 , 지방으로 보내기도 하고 또는 방치하여 병으로 계속 죽 었다 . 1666 년 8 월 3 일 생존자 16 명 중 15 명이 조그만 배로 탈주하여 우여곡절 끝에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 생존자 중 헨드릭 하멜에 의해서 쓰인 네덜란드 정부에의 보고서가 있다 . 이것이 「 조선유수기 ( 朝鮮幽囚記 ,) 1668 년 」 이 었다 . 이 책에 의해서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지리적 , 문화적 존재가 유럽에 알려지게 된다 . 유럽과 손잡고 조선을 개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아쉽게도 놓치고 말았다 . 이씨조선은 오백 수십 년 , 주자학을 유일의 가치로 삼아 일관해서 엄하게 섬겨왔다 . 이퇴계 ( 李退溪 ) 가 학조 ( 學祖 ) 이다 . 그렇다고 이씨조선에 이질의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 실학파 ( 實學派 ) 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 실학파는 주자학의 사변 성 ( 思辨性 ) 은 공론 ( 空論 ) 에 불과하다는 주장부터 출발하였다 . 그 원조는 유형원 ( 柳馨遠 , 1622-1673) 이었다 . 당시 임진왜 란으로 황폐한 국토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게끔 유형원은 벽촌으로 이주하였다 . 촌민 안으로 파고들어가 농업 , 목축 , 조선 등을 지도하면서 「 반계수록 ( 磻溪隧錄 )」 을 저술하여 실학사상의 체계화를 도모하였다 . 이 학파는 「 실사구시 ( 實事求是 )」 의 학문이다 . 공론을 배제하고 사실을 확인하여 진상 , 진리 ( 是 ) 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 실제를 중요시하고 과학적 , 합리적으로 , 현실적으로 사물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 조선 실학파의 흐름은 유형원 ( 柳馨遠 , 1622-1673) 이익 ( 李瀷 , 1681-1763) 홍대용 ( 洪大容 , 1731-1783) 박지원 ( 朴趾源 , 1737-1805) 박제가 ( 朴齊家 , 1750-1815) 정약용 ( 丁若鏞 , 1762-1836) 으로 이어졌으나 , 큰 강을 형성할 수 없었다 .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제 ( 乾隆帝 ) 의 고희 ( 古稀 ) 축하사절단 수행원으로 북경 ( 北京 ) 에 간 것은 1780 년이었다 . 그때 조선 에는 물자 유통용의 차 ( 車 ) 조차 없었다 . 문명사적 경이라고 할 수 있다 .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 피스 톤의 왕복운동을 원운동 ( 圓運動 ) 으로 바꾸어 차륜 ( 車輪 ) 을 움직이게 한 것은 1781 년이었다 . 박지원은 문학자이면서 인문과학적인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 그가 북경을 왕복하였을 때 청조의 사물을 면밀 하게 관찰하였다 . 박지원은 북경에서 몇 천 몇 백이라는 차를 보았다 . 승용차도 있고 화물차도 있고 군대 대포용포차도 있 었다 . 또한 박지원은 민생우선주의자였다 . 그래서 승용차와 화물차가 있어야 했다 . 더욱 여러 종류 차의 두 바퀴 간격을 모 두 동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모든 종류의 차의 양 바퀴 간격을 동일하게 하면 , 쉽게 차의 나라가 될 수 있다 고도 하였다 . “ 차를 위한 차도를 만들어야 한다 ” 고도 주장하였다 . 이 주장은 같은 실학파 선배이고 , 수학 , 천문학에 도통한 홍대용도 주장하고 있었다 . 박지원의 청국왕복기행문에 「 열하일기 ( 熱河日記 )」 가 있다 . 담채 ( 淡彩 ) 한 문인적기행이 아니고 동시대의 유럽여행가처주암칼럼 91 자원리싸이클링 제 30 권 제 2 호 , 2021 럼 사물을 입체적으로 관찰하고 원근감 ( 遠近感 ) 으로 묘사하고 있다 . 박지원을 평생 형님으로 사사한 박제가 ( 朴齊家 ) 는 중 국이 전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산업기술을 조선에 들여오게 하기 위하여 연구하였다 . 그 범위는 농업 , 양잠 , 배 ( 船 ) 와 차 ( 車 ) 그리고 벽돌의 제조법 등이었다 . 돌이켜보면 조선은 중국과 인접하고 있다 . 더욱 조선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겨왔다 . 그러면서 중국의 전통적인 산업 기술로부터 스스로 격리 ( 隔離 ) 해온 것은 형이상적 ( 形而上的 ) 이유라고 볼 수 있다 . 1780 년대에 와서 박지원 및 박제가가 비로소 그 중요성을 지적한 것은 이씨조선의 무감각한 단편을 보여준 것이다 . 도그마 ( 敎條 ) 의 비극이고 , 주자학의 참화 ( 慘 禍 ) 이기도 하다 . 결정적으로 조선을 망할 수밖에 없게 한 것은 고종의 무능함이었다 . 조성왕조 400 년이 병약하게 흘러왔지만 , 그 병색 을 걷고 그나마 회복될 수 있었던 기회를 고종은 다 발로 차 버렸다 . 오로지 자기 목숨과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를 버렸다 . 고종이 나라를 일본에게 바친 격이다 . 司馬는 고종과 대원군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만일에 언급했더라면 위의 글 ( 전출 , 매국노 고종 p.19) 과 같은 내용 을 기술하지 않았겠는가 싶다 . 司馬는 탐라기행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 「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격렬할 만큼 자부심이 강하다 . 이러한 나라를 합병한다는 것은 이것만으로도 일본의 우 행 ( 愚行 ) 임을 할 수 있다 . 먼저 , 수천 년의 당당한 독립국에서 독립성을 탈취하고 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 더욱 이 민족을 경시 ( 輕視 ) 혹은 경찰 행정적으로 경계 ( 警戒 ) 한 것이다 . 바보로 혹은 우범자 취급을 하여 견디기 힘들게 하였다 . 그 리고 여러 가지 “ 황민운동 ( 皇民運動 ” 으로 고유의 언어와 성 ( 姓 ) 을 없애 , 자존심의 근본에 굴욕을 주었다 . 나 자신은 , 한국 이 고유의 기품이 있는 문화를 연속 유지해온 점에서 세계적으로 흔하지 않은 민족으로 생각하였으며 이 민족에 대한 존 경심을 잃은 적이 없다 .」 (2021 년 2 월 7 일 기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