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58 자연,터널그리고 지하공간인문학 산책터널! 인간의 삶을 묻다. 확률적 안전의 개념은 확률적 사고를 포함한다지하공간을 설계하는 데는 수많은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좀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지상건축의 안정은 내적인 형태와 지반의 지지능력 정도다. 건축물의 재료인 콘크리트나 철강 등 탄성체는 구조해석 조건으로 보면 설계의 불확실성이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지하공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지하공간이 소성체에 가까운 지반에 둘러싸여 있는 점은 물론이고 이미 지하공간을 선점하고 있는 인접한 건축물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완성된 지하공간 주변에서 다른 굴착공사가 이루어질 경우 응력 불균형으로 인한 균열이나 변위 등 다양한 문제가 적잖게 일어나고 있다. 공간의 규모와 비례해서 불연속면이나 단층 등 암반의 결함이 커지는 것도 문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앵커, 록볼트 및 약액주입 등 다양한 지반보강공법이 개발되어 있지만 이로 인해 인접대지 소유주와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설계를 위해서는 탄성파나 초음파 탐사 구조해석 등 다양한 기법이 동원된다. 일반적인 설계의 과정은 굴착하려는 지하공간 주변을 유한요소로 나누어 해석하고 응력상태를 정밀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인 조사를 통해 파악한 땅속이 어떻게 변수가 숨겨져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하므로 모든 파라미터를 확률적으로 적용할 수밖에 없다. 확률적인 안전의 이면에 확률적 사고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직은 안전율의 증가와 보수적 관점의 설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엔지니어들이 항상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지하공간을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지하공간은 지상 못지않게 중요한 도시의 구성요소다. 그러나 지상건축물이 도시계획법이나 건축법 등 다양한 법률에 의해 계획단계부터 관리되는 것에 비해 지하공간에 대한 법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이 때문에 도로 하부 등 도시의 지하공간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라는 식의 난개발이 성행되고 있다. 지하매설물이 얽히고설켜 상하수도 파손이나 땅꺼짐과 같은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도심 건축물의 지하층에는 영구배수공법이라는 웃지 못 할 공법이 버젓하게 적용되고 있다. 건축비를 줄이기 위해 내 건축물 주변의 지하수를 말려버리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도시의 지속가능성이란 개념은 지금 내가 계획하는 시설물이 미래의 엔지니어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한다는 뜻을 함의한다.도시계획법이나 건축법에서 볼 수 있는 지하공간에 대한 부분은 기껏해야 일정깊이 이상을 팔 때는 굴토심의를 받아야한다는 정도다. 2018년부터 시행되는 ‘지하안전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10m 이상 굴토공사를 할 때 지하수의 영향을 검토하라는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무분별한 지하공간 개발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기반이 조속히 마련되어야 한다. 가장 시급하게 반영해야할 사항으로는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지하공간 공공재 개념이다. 여기에는 지하수를 비롯한 자원과 공간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사용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담아야 한다. 이외에도 화재 수해 지진 등 재난에 대비한 시설기준, 환기 채광 습기 방사선 등 건강과 관련되는 사항, 지하수 오염과 수위 저하에 따른 주변 생태환경 관리 등도 늦추어서는 안된다. 모호한 기준으로 분쟁이 잦은 지하보상기준 등 지하공간구축을 지원하기 위해 어떤 제도가 필요한 지 꼼꼼히 살펴야할 것이다.Vol. 20, No. 2 59지하공간, 미래도시의 꿈불안은 무지에서 비롯된다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불안이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밖이 궁금할 때 창을 연다.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부는지, 아이가 놀이터에서 잘 놀고 있는지, 창밖으로 누가 지나가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안심한다. 물론 창을 열지 않고도 우리는 알 수 있다. CCTV는 놀이터나 유치원에 있는 아이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인터넷만 열면 날씨는 물론 알고 싶은 모든 정보가 손쉽게 눈에 들어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보이지 않는다고 불안해하는 것일까. 이러한 심리적 부담은 지하공간을 계획할 때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지하공간 주변의 높낮이를 조정하거나 측면 또는 천정을 개방하는 방법, 지하공간 내에 작은 개울이나 수목 등을 이용한 생태환경 조성, 거울이나 집광장치를 이용한 햇빛 유입 등 심리적 부담을 완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법을 개발하고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오랜 세월 무의식에 잠재된 지하공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심하게 배려하는 한편 아늑한 지하공간의 장점을 부각시키다 보면 지하건축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눈여겨 볼 지하공간 사례서브 메트로폴리스(Sub Tropolis)미국 캔자스시티. 채굴이 끝난 광산의 지하공간을 주거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도시. 규모는 작지만 우리나라의 광명 케이번 월드도 은광을 채굴하던 지하공간을 위락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사례다.서울 구도심 지하건축 프로젝트시청에서 종각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4.5km의 지하건축계획. 지하철역사 12개와 주변의 대형건축물을 연결하게 된다. 몬트리올 레조(RESO) 지하가로망을 둘러보고 온 박원순 서울시장이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아직은 계획단계에 머무르고 있다.세른(CERN) 입자가속터널스위스 제네바. 유럽의 원자핵연구소로 다양한 지하건축 시설과 함께 직경 8.5km의 입자가속터널이 있다. 이외에도 샌포드 암흑물질연구소, 파리 음향연구소, 핀란드 기술연구소 등 많은 연구시설이 지하건축으로 만들어져 있다. 레조(RESO) 지하가로망캐나다 몬트리올. 겨울철 혹독한 날씨로부터 시민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지하쇼핑센터를 꾸준히 확정해 지금에 이르렀다. 최근 완공된 면적을 기준으로 보면 12km2에 달한다.미르니 에코시티 프로젝트러시아 시베리아. 다이아몬드 채굴을 위해 굴착한 원추형 지하공간을 독립적인 지하도시로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직경 1300m, 깊이 665m에 이르며 벽면을 주거공간으로 개조하고 투명한 소재로 지붕을 씌우는 계획이 진행중이다.어스 스크래이퍼(Earth Scraper) 프로젝트멕시코 맥시코시티. 아즈텍의 피라미드를 거꾸로 놓은 듯한 지하건축 계획으로 러시아의 미르니 에코시티 프로젝트와 유사한 구조다. 미르니가 지붕의 지지구조를 주앙기둥식으로 배치한 반면 어스 스크래이퍼는 강구조로 틀을 짜서 지지토록 하였다. 카파도키아 고대 지하도시터키 카파도키아. 지하건축의 원조라 할 만한 시설로 무른 석회암지대를 인력으로 굴착해 만들었다.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종교탄압을 피해온 기독교도에 의해 정밀하게 확장되었다. 소금동굴을 활용한 지하공간 구축오스트리아 할슈타트. 선사시대부터 채굴되어온 소금동굴을 이용 주거와 위락공간으로 재구축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폴란드의 비엘리치카, 루마니아의 슬러닉 등 암염이 생산되는 많은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60 자연,터널그리고 지하공간인문학 산책터널! 인간의 삶을 묻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기자 대피라미드세계 정복의 꿈을 꾼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에 나서다.왕정이 폐지된 18세기말의 프랑스. 겉으로 보기에 제1공화정의 총재 정부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당시 뛰어난 무공으로 국민적 인기가 매우 높던 코르시카 출신의 젊은 군사영웅 나폴레옹이 쿠테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었다. 1798년 초 총재정부는 한 가지 꾀를 냈다. 나폴레옹에게 이집트 원정을 권유했던 것이다. 당시 지중해와 인도양 등에서 해상권을 거머쥐고 있던 영국에 일격을 가해야한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이는 위협적인 인물을 멀리 쫓아내고자 하는 노림수였다. 나폴레옹은 이런 속셈을 꿰뚫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는 이집트 정벌을 통해 자신의 쿠테타를 정당화시킬 명분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였다.나폴레옹은 몽상가였고 단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되고 싶었다. 그는 이집트를 정복한 다음 인도에 왕정이 폐지된 18세기말, 겉으로 보기에 제1공화정의 총재정부가 이끄는 프랑스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당시 뛰어난 무공으로 국민적 인기가 매우 높던 코르시카 출신 젊은 군사영웅 나폴레옹이 쿠테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었다. 1798년 초 총재정부는 한 가지 꾀를 냈다. 나폴레옹에게 이집트 원정을 권유했던 것이다. 당시 지중해와 인도양 등에서 해상권을 거머쥐고 있던 영국에 일격을 가해야한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이는 위협적인 인물을 멀리 쫓아내고자 하는 노림수였다. 나폴레옹은 이런 속셈을 꿰뚫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는 이집트 정벌을 통해 자신의 쿠테타를 정당화시킬 명분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였다.나폴레옹은 몽상가였고 단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되고 싶었다. 그는 이집트를 정복한 다음 인도에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오트만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 거기서 유럽을 공격해 동서양의 맹성렬우석대학교 교수Vol. 20, No. 2 61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기자 대피라미드나폴레옹의 피라미드 전쟁을 묘사한 그림(오른쪽 위에 기자 피라미드군)거대한 제국을 완성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집트 원정에는 확실히 세계 정복의 상징성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랬으며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그랬다. 이 역사적인 영웅들은 이집트를 원정함으로써 세계사에 그들의 족적을 확실히 남겼다. 나폴레옹은 단지 프랑스의 영웅이 아니라 세계적인 영웅, 나아가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고 싶었다. 나폴레옹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던 총재정부는 마침내 이집트 원정을 공식 결정했다. 나폴레옹의 지휘 아래 출발한 함대의 총병력은 육군 3만 8,000명, 해군 및 일반 선원 1만 명에 이르렀다. 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 거기서 유럽을 공격해 동서양의 거대한 제국을 완성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집트 원정에는 확실히 세계 정복의 상징성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랬으며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그랬다. 이 역사적인 영웅들은 이집트를 원정함으로써 세계사에 그들의 족적을 확실히 남겼다. 나폴레옹은 단지 프랑스의 영웅이 아니라 세계적인 영웅, 나아가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고 싶었다. 나폴레옹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던 총재정부는 마침내 이집트 원정을 공식 결정했다. 나폴레옹의 지휘 아래 출발한 함대의 총병력은 육군 3만 8,000명, 해군 및 일반 선원 1만 명에 이르렀다.피라미드 전쟁1798년 7월, 영국 해군의 눈을 피해 이집트의 고도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거기에 2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의 이집트 정복은 비교적 순조로웠는데 그나마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입성을 눈앞에 두고 기자 피라미드 군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가 비교적 치열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약 3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이집트 저항군엔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입혔다.기자의 대스핑크스 코가 깎인 것이 나폴레옹군과 이집트군의 전투 때 빗맞은 것이라든지 나폴레옹군이 스핑크스 코를 목표로 포격 훈련을 했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나돌지만 이는 모두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전투는 기자 피라미드군에서 충분히 떨어진 곳에서 치러져 포탄이 그곳까지 날아갈 일은 없었다. 또 나폴레옹이 고대 이집트 유적들을 철저히 보호했으며, 관련 학자들이 동행하며 군사들의 행동에 주의를 주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기자 피라미드군을 비롯한 고대 이집트 유적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자신의 심경을 병사들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전달했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 전투 개시를 앞두고 “병사들이여, 피라미드들의 꼭대기에서 4,000년 역사가 여러분들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식으로 사기를 북돋웠던 것이다. 프레데릭 루이스 노든이라는 화가가 1737년에 그린 대스핑크스 그림을 보면, 이미 그 당시부터 코가 없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62 자연,터널그리고 지하공간인문학 산책터널! 인간의 삶을 묻다. <이집트 견문기> 표지이집트 학사원과 이집트학의 출발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외교 군사적인 측면에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 해군의 끊임없는 위협으로 이집트 원정군은 프랑스 본토와 원활한 정보교환과 배급 및 군사 지원이 어려웠고 결국 고립이 되고 말았다. 1799년 11월, 나폴레옹은 무기력한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부하 몇 명과 함께 프랑스로 잠입 쿠테타를 일으킨다. 이처럼 귀환 이전 약 1년 반 동안 나폴레옹은 자신이 처음 꿈꾸었던 것과 같은 외교 군사적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함께 데려간 170여명의 학자들의 활동에 의해 <이집트학>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의 원정을 높게 평가해줄 만하다. 나폴레옹은 통치자로써 이집트 땅에 도서관을 세우고, 화학 실험실을 만들고, 의료 서비스 체계를 구축하는가 하면 천문대와 식물원을 짓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자신이 단지 정복자가 아니라 이집트 땅에 서구 문물의 혜택을 주려는 계몽 군주임을 인식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무엇보다도 나폴레옹이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한 것은 이집트 학사원 설치다. 그는 수학자이자 측량 및 축성 전문가였던 가스파르 몽주에게 학사원 운영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이 학회엔 수학, 물리, 정치경제, 문학예술의 4분과를 두었는데 나폴레옹은 몽주와 함께 수학분과에서 활동했다. 이런 학술활동의 결과는 클레베르의 제안으로 ‘고대’, ‘현대 상황’, ‘박물지’ 그리고, ‘지지地志’라는 네 개의 큰 주제로 정리되어 여러 권의 큰 판형의 책자들로 구성된 《이집트 견문기》로 발간되었다. 프랑스 학자들의 대대적인 학술 활동은 근대 이집트 연구의 기원으로 평가 받는다.나폴레옹 원정에 따라간 프랑스의 측량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기자 피라미드군, 그 중에서도 단연 대피라미드였다. 대피라미드의 내부 조사는 쟝-마리-조셉 쿠텔 대령과 건축가인 쟈크-마리 르 페레가 맡아서 했고, 외부 크기와 피라미드군의 전체 구도에 대한 조사는 에듬 프랑수아 조마르와 토목 공학자 프랑수아 샤를 세실이 맡았다. 몽주는 세 피라미드들에 사용된 석재가 모두 합치면 어느 정도나 될지 어림 계산을 해보았다. 그 결과 높이 3미터 폭 1미터의 돌담을 쌓아 프랑스 전체를 둘러쌀 수 있는 것으로 밝혀져 나폴레옹과 그의 학자들 모두가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조마르의 기자 대피라미드 연구나폴레옹의 원정대에 따라갔을 때 조마르는 20세로 아직 학생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 대피라미드 측량에 참여하는 등 유적 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대피라미드 한 밑변의 길이를 230.902미터로 측정했다. Vol. 20, No. 2 63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기자 대피라미드이집트 기자 피라미드군(대피라미드가 가장 뒤쪽에 위치)그리고 높이를 144미터로 측정한 후 옆면이 지면과 이루는 각도를 51도 19분 14초로 구했다. 이를 통해 그가 얻은 변심거리는 184.722 미터였다. 스트라보는 변심거리가 고대 그리스의 1 스타디움에 해당한다고 했다. 통상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1스타디움은 185.5미터로 조마르의 측정치는 스트라보의 주장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그런데 한편으로 고대 그리스의 1스타디움은 이집트 땅에서 지리학상 1/600도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이집트 땅의 평균 위도에서의 경도 1도에 해당하는 길이인 110,827.78 미터를 대입하고 이를 600으로 나누어 1스타디움에 해당하는 값으로 184.712미터를 구했다. 놀랍게도 이 수치는 자신이 측정한 변심거리와 불과 1센티미터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이는 단지 0.005%의 오차다. 이 놀라운 계산 결과로부터 그는 기자 대피라미드에 지구 크기가 기록되어있다고 결론 내렸다. 한편 또 다른 고대 그리스 기록에 의하면 대피라미드의 밑변 둘레길이가 지리학상 각도로 경도 1/2분에 해당한다. 따라서 조마르는 실제 계산을 해보았고 이런 조건을 만족하기 위한 한 밑변길이가 230.891미터로 자신이 측정한 값에서 1센티미터 정도 부족함을 깨달았다. 이 또한 0.005%의 오차에 불과했다. 조마르는 이 결과를 놓고 고대 이집트인들이 지구의 크기로부터 그들의 기본 측정단위를 도출해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자 대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조마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주어진 위도에서 각도에 따른 거리를 계산할 수 있는 천문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지구 크기에 대한 정확한 계산도 할 수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모든 결과로부터 그는 헤로도토스, 플라톤, 디오도로스 등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기하학이 탄생한 곳이 이집트 땅이라고 지목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조마르의 이런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당시 기자 대피라미드 측량에 참여했던 그라티아누스 르 페레Gratien Le Pere와 쟝 마리 조셉 쿠텔Jean-Marie-Joseph Coutelle대령은 대피라미드 외부 치수를 재 측량했다. 그들은 한 밑변의 길이가 조마르 측정치보다 2미터 정도 길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또 높이도 휠씬 높아서 변심거리가 크게 늘어나며, 따라서 조마르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오늘날 우리는 비교적 정확한 대피라미드의 치수를 알고 있다. 이를 통해 변심거리를 다시 계산해보자. 가장 최근 측정된 밑변길이 230.363미터와 옆면이 지상과 이루는 각도 51도 50분 40초로부터 얻어지는 변심거리는 186.438미터다. 64 자연,터널그리고 지하공간인문학 산책터널! 인간의 삶을 묻다. 기자 대피라미드 왕의 방에 들어간 나폴레옹에 대한 상상도이 값은 이집트 땅에서 지리학상 1/600도에 해당하는 길이인 184.712미터와 0.93% 차이가 난다. 또 이집트 땅의 평균 경도 1도의 1/480인 230.891미터는 최근 구한 대피라미드 한 밑변 길이 230.363미터에서 0.23% 벗어난다. 조마르가 주장했던 것처럼 극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 그리스 학자들이 상당히 실제 값에 근접한 지구 크기를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들 학자들은 이런 정보를 이집트인들에게 전해 들었을 것이 틀림없으므로 결국 고대 이집트인들이 상당히 정확한 지구 크기를 어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기자 대피라미드와 나폴레옹템플라 기사단 단원임을 자처하는 해리 에번스는 나폴레옹이 세계 정복을 꿈꾼 계기를 기자 대피라미드와 연관시킨다. 그는 나폴레옹이 기자 대피라미드를 방문해 세상을 통치할 철학과 영감을 얻었으나 지나친 야심이 그를 퇴락의 길로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과 관련해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중 홀로 기자 대피라미드의 ‘왕의 방’에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왕의 방은 대피라미드 중앙부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직육면체의 공간으로 발굴 초기부터 가장 중요한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 그 안에는 석관이 존재하며, 따라서 파라오의 미라를 안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으로 여겨져 왕의 방이란 이름이 붙었다. 대피라미드 내부로 진입한 나폴레옹은 왕의 방에 도달한 후 부하들을 나가게 한 다음 혼자서 그곳에 머물렀다. 몇 시간 후 거기서 나온 나폴레옹은 하얗게 질려있었는데 안에서 어떤 체험을 했는지 아무에게도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측근들은 그가 자신의 미래 운명을 보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어 보인다. 나폴레옹의 친구로 이집트에서 그의 개인 비서를 했던 루이 앙투앙 포블레 드 브리엔느의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이 기자 대피라미드 안에 들어간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고고학에 관심이 많긴 했지만 현장에서 직접 조사를 하는 일은 대동하고 간 학자들에게 일임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당시 대피라미드 내부는 질식할 정도로 공기가 나빴으며 박쥐 똥이 수북이 쌓여있는 불결한 장소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그곳으로 들어갈 의지가 있었다고 해도 브리엔느가 말렸을 것이다.Vol. 20, No. 2 65▨ 대곡~소사 복선전철 민간투자시설사업1. 사업개요□ 사업명 : 대곡~소사 복선전철 민간투자시설사업□ 사업목적 : 수도권 남서부 지역주민의 교통편의와 지역경제 활성화로 수도권 광역철도망 체계의 연계성 확보하고 국제교통요충지인 김포공항에 철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도로교통 밀집완화와 철도 이용 수송 창출과 철도 Network와 부합되는 수도권 서남부 지역의 남북 방향 철도 구축□ 사업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부천시 원미구 일원- 경기도 : 고양시 덕양구일대, 부천시 오정구 및 원미구 일대- 서울시 : 강서구 일대□ 사업시행자 : 서부광역철도 주식회사□ 사업 기간- 2018년 4월 ~ 2020년 12월(공사)- 2021년 6월 개통예정□ 총사업비 : 1조 3,504억 원□ 사업연장- 본선 : 18km359.26- 정거장 : 신설 3개소, 기존 2개소국내사업장선종 _ (주)삼보기술단 이사김기환 _ (주)삼보기술단 부장[노선 개요도]66 자연,터널그리고 지하공간프로젝트소개2. 시설개요□ 시설개요대곡~소사 복선전철 민간투자사업은 남서부의 기존 소사~원시 노선을 수도권까지 연결하여 지역주민의 교통편의 및 수도권 접근성을 용이하도록 계획된 민간 투자사업의로 공기단축과 공사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총 5공구로 분할되어 시공되며 전체 노선은 총 18.3km로 정거장 5개소(터널 정거장 3개소(DS01, DS02, DS03)), 환기구 12개소로 이뤄져 있으며 각 지역에 맞도록 복선단면과 단선병렬로 건설되는 사업으로 공구별 연장 및 구조물별 시설계획은 다음과 같다.[노선 현황][대곡~소사 복선전철 민자사업 구조물 현황]구분연장비고구분연장비고토공2,920.00m기존 경의선 공유쉴드터널2708.28m단선병렬U-TYPE324.00m복선NATM터널11,380.59m복선, 확폭개착BOX280.00m(복선)564.09m(단선)복선단선병렬정거장5개소대곡, 능곡,DS01,DS02, DS03비개착BOX131.86m단선병렬환기구12개소#1~#12본선 터널 정거장 단면(DS 01, 03) 정거장 단면(DS 02) 쉴드 터널[터널 단면]Vol. 20, No. 2 67국내사업□ 쉴드 TBM 터널 구간 현황대곡~소사 복선전철 민간투자사업 노선 중 2공구는 쉴드 TBM공법이 적용되어졌으며 퇴적층 통과, 연․ 경암 통과, 한강 하저 통과구간으로 구분되어진다.총 사업연장 18.32km이며, 쉴드(Shield) TBM 터널은 한강하저, 행주산성이 위치한 덕양산, 자유로 하부 등을 통과하는 2.695km의 단선병렬 터널로 계획됨[쉴드 TBM구간 공사개요]□ 쉴드 장비본 구간은 주변 작업여건과 지층상태가 복합지반임을 고려하여 EPB 기종 선정하였으며, 한강하저통과구간임을 감안하여 고수압 대처 가능하도록 스크류컨베이어 2단 설치 및 Plug Zone 형성으로 수압작용 감소하도록 하였다.[쉴드 TBM 개요도] 그 밖에 세그먼트라이닝은 폭 1.5m, 두께 350mm를 적용하였으며, 세그먼트 분할은 7분할(6+1key)로 링간연결방식은 지그재그로 배치하였다.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