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114 불교학연구 제71호 院 ) 이다 . 또 중원의 서쪽에는 무상원 ( 無常院 ), 성인병원 ( 聖人病院 ), 불시병원 ( 佛 示病院 ), 사천왕헌불식원 ( 四天王獻佛食院 ), 욕실원 ( 浴室院 ), 유측원 ( 流厠院 ) 등 여섯 원이 있었다 .65) 이 중 사천왕헌불식원은 식당으로 보이며 , 욕실원은 욕 실 , 유측원은 화장실이고 , 무상원 , 성인병원 , 불시병원이 의료와 관련된 건물 이다 . 무상원은 승려들이 중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공간이었다 . 성인병원 은 사리불 ( 舍利弗 ) 등의 성인 ( 聖人 ) 이 투병한 곳으로 , 의약이 항상 준비되어 있 는 공간이라고 한다 . 불시병원은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질병을 살피는 공간 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 인도 사찰의 한 구역이었던 병원이라는 치료 공간은 중 국 사찰 구조 속에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송 조훈 ( 曹勛 , 1098-1174) 은 「선림사기 (仙林寺記) 」에서 선림사의 부속 건물들을 나열하는데 , 그 안에 ‘ 병원 (病院)’ 이 포함되어 있다 .66) 한국의 전근대 사찰에 병원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 인할 수 없으나 , 대규모 사찰에는 중국의 사례와 같이 병원 공간이 별도로 있 었을 가능성이 있다 . 아울러 사찰에는 의약품이 구비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 우선 불교의 계율 에는 의약품을 운용 , 관리하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 당 의정 ( 義淨 ) 이 번역한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藥事) 에는 약을 사용하다 남으면 병방 (病坊) 으로 보내 보관하고 , 필요한 사람은 병방으로 가서 얻어 사 용하라고 설한다 .67) 계율에 설해져 있는 만큼 효율적으로 의약품 관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또한 불전에 공양하는 공양물이나 의례에 사용하기 위한 용도의 약들이 있었다 . 엔닌 [ 圓仁 ] 의 입당구법순례행기 ( 入唐求法巡禮行記 ) 에 의하면 , 회창폐불 시기였던 회창 ( 會昌 ) 4 년 (844) 7 월 15 일에 불전에 공양한 꽃과 약들을 모두 거두어서 흥당관 ( 興唐觀 ) 의 천존 ( 天尊 ) 에게 제사를 지냈다 고 한다 .68) 불전 공양물로 약이 있다는 것은 사찰에 약이 구비되어 있었음을 65) 關中創立戒壇圖經 (T1892:811a13-15). 66)이현숙 2020, 7-14. 67)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藥事 (T1389, 1:0601c01). 68) 入唐求法巡禮行記 권 4, 會昌 4 년 7 월 15 일 , “ 七月十五日供飬 諸寺作花蠟花鉼 假花菓樹等 各競竒妙 常 例皆於佛殿前 舖設供養 傾城巡寺随喜 甚是盛會 今年諸寺鋪設供養 勝於常年 勑令諸寺佛殿供養花藥等 盡고려~조선 전기 불교계의 전염병 대응과 대민 구료 115 의미한다 . 사찰은 많은 인원이 유숙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구성원들에게 청결을 요 구하였다 . 인도 사찰의 경우지만 약기수원의 중원 서쪽에는 몸을 씻을 수 있는 욕실이 있었고 화장실 공간이 별도로 설정되어 있었다 . 동아시아의 경우 , 선원 의 규범과 규칙을 규정한 선원청규 ( 禪苑淸規 ) 에는 욕실 담당자인 욕주 ( 浴主 ) 의 직무 절차가 실려 있다 . 불교 의례를 개설하기 이전에 목욕재계 ( 沐浴齋戒 ) 를 해야 하였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라도 사찰에는 욕실 공간이 갖추어져 있었다 . 실재로 국행 수륙재의 주요 개설 장소였던 진관사 ( 津寬寺 ) 수륙사 ( 水陸社 ) 의 발 굴 현황을 보면 , 수륙재 의례를 개설하는 장소에 욕실터가 발견되었다 . 의례 절차상 관욕 (灌浴) 이 필요하여 설치된 것이다 .69) 일반적인 사찰 목욕 공간에 대한 발굴 결과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 욕주의 존재와 목욕재계의 필요성을 통 해 일상적인 목욕 공간이 존재하였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 또한 선원청규에 는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보는 법과 볼일이 끝난 후 뒤처리를 하는 법을 명시하 고 있기도 하다 . 이는 일상적인 청결 유지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나아가 사찰은 환자가 발생했을 때의 보고 절차 및 간병법도 구축되어 있었 다 . 교리적으로는 많은 불교 경전과 규율에서 간병자로서의 자세를 설하고 있 다 . 선원청규에 의하면 승려가 병에 걸리면 지정된 보고선에 보고를 하고 휴 가를 받아 쉬거나 치료를 받도록 규정되어 있다 . 병에 걸린 승려를 위하여 동 료 승려들이 향촉과 불상을 놓고 비로자나불을 찬불 염송을 하거나 , 병이 중할 때에는 아미타불을 염불하였다 . 임종 시에는 절차에 따라 유언을 받고 장례를 지냈다 .70) 이러한 절차는 환자가 발생하였을 때 혼란 없이 대처할 수 있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 범망경 (梵網經) 에는 여덟 가지 복전을 소개하고 있는데 , 그 중에서 간병의 복전이 제일이라고 하였다 . 병자가 있으면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처럼 살펴야 般到興唐觀 祭天尊 十五日天子駕幸觀裏召百姓令看 百姓罵云 奪佛供養祭鬼神 誰肯觀看 天子恠百姓不來 諸寺被奪供養物 恓惶甚也 .” 69) 김수경 2012, 51-54 참조 . 70) 이현숙 2017, 281-284.116 불교학연구 제71호 하며 , 병자를 보고도 구완하지 않으면 경구죄 ( 輕垢罪 ) 를 범하는 것이라고 설한 다 .71) 십송율 ( 十誦律 ) , 사분율 ( 四分律 ) , 마하승기율 ( 摩訶僧祇律 ) 등에는 간병법이 서술되어 있다 . 그 내용은 석가모니가 간병인도 없이 대소변 속에 누 워 있던 병에 걸린 비구를 보고 생각한 간병법이다 . 환자의 식사 준비 , 환자의 대소변이나 가래 , 토사물을 처리하는 것 , 자비심으로 간병에 임할 것 , 환자가 낫거나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탕약을 준비하는 것 등이다 .72) 사분율의 간병 계에 따르면 승려는 기본적인 의약 지식을 가져야 했고 병자의 심신을 함께 치 료해 줄 수 있어야 하였다 . 자장 ( 慈藏 ) 이래로 한국 불교계에서 사분율이 중 시되고 그에 대한 주석서가 다양하게 저술되었던 점 등에서 승려들은 간병자 로서의 자세를 체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73) 또한 구체적인 간병 방법을 제시 하고 있는 십송율등의 율은 의술이 없는 승려더라도 간병이라고 하는 의료 보조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 승려들 스스로도 건강을 관리하기 위한 실천을 하고 있었다 . 그 예로 경행과 세예법을 들 수 있다 . 앞서 전염병 기양을 위하여 가구경행이 거행되었다고 언 급하였는데 , 경행은 원래 좌선수행과 관련하여 시작되었다 . 좌선 중 잠시 일어 나 일정한 구획 즉 경행처 (經行處) 내를 천천히 걸어 다니는 것으로 , 오랜 좌선 으로 인해 생기는 장애에서 해방되는 행법 (行法) 이다 . 신체적 건강을 얻고 수 행에 헤이해지거나 수마에 빠지는 것을 막아 맑은 정신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74) 실제로 승려들은 오랜 시간을 앉아 참선을 하기 때문에 관절염 이나 디스크 등 운동기계 질환이 많이 나타난다 . 이 질환들은 고려시대 승려비 문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질병들이다 .75) 이것이 전염병이나 질병 치료와 직접 관련이 되지는 않으나 , 승가 내에서 건강관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 71) 梵網經 , 「 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 」 第十 (T1484, 2:1005c8-13), “ 若佛子 見一切疾病人 常應供養如佛無 異 八福田中看病福田第一福田 若父母師僧弟子疾病 諸根不具 百種病苦惱 皆養令差 而菩薩以惡心瞋恨 不 至僧房中 城邑曠野山林道路中 見病不救者 犯輕垢罪 .” 72) 新村拓 2013, 66-67. 73) 이현숙 2019, 191-194 참조. 74) 강호선 2019, 34-35. 75) 이현숙 2017, 270-271 참조 .고려~조선 전기 불교계의 전염병 대응과 대민 구료 117 을 알 수 있다 . 세예법 , 즉 세수하는 방법에도 건강관리를 위한 실천이 포함되어 있다 . 의 정의 남해기귀내법전 (南海寄歸內法傳) 은 그가 인도에서 유학하던 중에 닦은 승려의 생활 규범을 기록한 것이다 . 여기에는 치목 (齒木) 의 사용법과 이익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 중국 사찰에서 치목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하며 , 그 잘못된 점과 인도 사찰의 치목 사용법을 소개하고 있다 . 그에 의하면 치목 은 이를 단단하게 하고 입 냄새를 없애주며 치아의 통증을 낫게 해준다 .76) 치 목의 사용은 구내 청결과 치아 건강을 유지하는 좋은 방편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의정의 저술은 신라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 신라 의상 ( 義相 ) 은 평소 세수한 후에 수건을 사용하지 않고 저절로 마르게 하였다고 하는데 , 이것은 의정이 소개하는 인도의 세안 방법이었다 . 신라나 고려인들이 인도식 으로 치목을 사용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 의정의 남해기귀내법전의 내용이 의상에게 전해졌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77) 또 신라 승장의 금광명최승 왕경소 ( 金光明最勝王經疏 ) 에는 주문을 외우기 전에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는 과정으로 새벽에 치목을 씹는 절차가 나오기도 한다 .78) 승려들에게 치목 사용 은 낯선 것이 아니었고 , 치목을 사용한 구내 청결 관리 방법도 사찰 내의 생활 규범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 이상과 같이 사찰은 그 자체에 환자를 치료하는 공간을 두었을 가능성이 크 고 , 약재가 구비되어 있었다 . 또 사찰의 구성원들은 환자가 발생하였을 때의 76) 南海寄歸內法傳 (T2125, 1:0208c19-21), “ 麁胡葉根極為精也 ( 即倉耳根并截取入地二寸 ) 堅齒口香 消食 去癊 用之半月口氣頓除 牙疼齒憊三旬即愈 .” 77)김복순 2015, 189-190 참조. 78) 金光明最勝王經疏 < 輯逸 > (H34, 2:0227a07-09), “ 苦有受持讀誦呪者 應七日七夜受八支戒 於晨朝時先嚼 齒木淨澡漱已 及於晡後香華供養一切諸佛 .” 惠永 의 白衣解 에는 관세음보살이 버드나무 가지를 꽂은 팔공덕수를 정병에 담아 놓고 있는 이유 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 부처님이 善提 비구에게 신주를 가지고 維耶梨城 사람들을 전염병에서 구제하게 하여 29 년 간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 그런데 선제 비구가 죽은 후 다시 전염병이 돌아 사 람들이 선제 비구가 기거하던 곳에 가 보니 , 그가 생전에 씹던 치목을 땅에 던져 놓은 것이 숲을 이 루었다고 한다 . 그 숲에 있는 샘의 물을 담고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와서 병든 사람을 씻어 주니 독 기가 소멸되었다고 한다 ( 김영미 2010, 173). 치목의 위생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 청결 을 돕는 도구인 치목이 질병 치료와의 연관성 속에서 거론되는 점이 흥미롭다 .118 불교학연구 제71호 대처법을 잘 알았고 병자 구완에 힘써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내면화되어 있었 다 . 승려들 사이에 위생 관념이 있었고 건강관리를 하였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 이러한 물적・심적 사항들은 모두 사찰 내의 의료 인프라로 , 전근대에 사 찰이 사회의 의료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는데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 2. 사찰의 대민 구료 활동 이상과 같은 의료 인프라 덕분에 사찰은 전염병이 퍼졌을 때 사람들을 구료 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 이것이 단순히 간병하는 수준일 수도 있겠으나 , 실제로 상당한 치료 능력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전염병 발생 시 사찰에서 구 료 활동을 하도록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 고려시대의 경우 동서대비원에서 전 염병에 걸린 이들에 대한 구료를 담당하였는데 , 이곳에 승려가 속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 대비원에서는 단순한 간병에 그치지 않고 치료를 하 였을 것이며 , 그것이 가능하도록 의술을 갖춘 승려가 속해 있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79) 개별 사찰이 구료를 담당한 사례들도 있다 . 고려 의종 6 년 (1152) 6 월에는 개 국사 (開國寺) 에서 기근에 시달리는 자와 역질 (疫疾) 에 걸린 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80) 이 해는 봄에 가뭄이 들어 3~4 월에 여러 차례 기우제를 지냈다 . 비가 오지 않아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기근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하였고 , 영양 상태가 불량한 사람들 사이에 역병이 돌았던 듯하다 . 개국사 구휼과 같은 6 월에는 역질을 기양하기 위하여 마리지천도량을 개설하고 72 성 ( 星 ), 천황대 제 ( 天皇大帝 ), 태일 ( 太一 ) 및 16 신 ( 神 ) 에게 역병을 물리치도록 초제 ( 醮祭 ) 를 지 내기도 하였다 .81) 기근과 역질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개국사에서는 음식과 함께 역병 치료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 개국사는 태조 때 창건된 사찰로 , 개경의 동남쪽 보정문 (保定門, 長霸門) 밖 79) 李炳熙 2015, 183-184. 80) 고려사권 17, 세가 제 17, 의종 6 년 6 월 庚辰 . 81) 고려사권 17, 세가 제 17, 의종 6 년 6 월 癸未 .고려~조선 전기 불교계의 전염병 대응과 대민 구료 119 에 위치해 있었다 . 개국사 앞에는 양광도 , 전라도 , 경상도 , 강릉도의 4 도로 연 결되는 길이 있어 , 4 도에서 개성으로 상경하는 사람들과 나가는 사람들로 인 파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82) 승려들을 출가시키는 관단 (官壇) 이 있 었고 대장경을 봉안하였으며 , 숙종과 고종의 진전사원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사찰 규모도 상당하였을 것이다 . 성종 15 년 (996) 에 서희 ( 徐熙 ) 가 병에 걸리자 개국사에 머무르며 치료를 하였다는 데에서 ,83) 의술에 능한 승려가 있었거나 의료로 이름이 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개국사는 큰 규모의 사찰이었기 때 문에 앞서 언급한 의료 인프라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 더구나 서희 와 같은 고위층이 질병 치료 목적으로 찾았던 곳이던 만큼 체계적인 의료 혹은 구완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 나아가 입지 조건도 남도의 각 도에서 개경으로 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 기근과 역질로 삶의 터전을 떠나 도시로 상경하는 인파가 몰릴 수밖에 없는 위치이다 . 효율적으로 구휼과 역질 치료를 할 수 있는 위치인 동시에 , 중증 환자들이 개경으로 입성하여 수 도에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84) 조선 세종 때에도 사찰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 세종 4 년 (1422) 에 기근이 들었는데 , 9 월에 굶주린 백성들이 서울로 와 저자거리에서 걸 식을 하자 흥복사 (興福寺) 에 구료소 (救療所) 를 두어 음식을 제공하였다 . 이때 부정 ( 副正 ) 윤성지 ( 尹誠之 ) 와 탄선이 그 일을 담당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 고 한다 .85) 흥복사는 태조 7 년 (1398) 무렵에 창건되었는데 , 현재의 탑골공원 위치에 있었다 .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넓고 평평한 곳에 위치해 있었고 , 그 앞에는 시전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었다 .86) 저자거리에서 걸식하 는 백성들을 위한 구료소를 설치하기에 적당한 위치였다 . 기사에는 죽을 주 82) 李齊賢 , 「 重修開國律寺記 」 , 동문선권 69, 記 . 83) 고려사권 94, 열전 제 7, 徐熙 . 84)이경록은 濟危寶 가 개경 동북면의 歸信寺 에 설치되어 개경으로 들어오는 전염병 환자를 막는 역 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李京錄 2008, 213). 이러한 역할은 개국사도 마찬가지였을 것 이다. 85) 세종실록권 17, 세종 4 년 9 월 甲子 (10 일 ). 86) 김윤주 2017, 52.120 불교학연구 제71호 었다고 하여 음식을 제공한 내용만 나오지만 , ‘ 구료 ’ 소라는 명칭과 앞서 언급 한 탄선의 행적을 보았을 때 환자 구완과 질병 치료도 하였을 것이다 . 세종 4 년의 기근 때 역병이 돌았다는 내용은 없다 . 그러나 기상이변과 기근 , 역병은 흔히 연계되어 발생하는 것으로 , 앞의 두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상황에서 전 염병의 발생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대규모 사찰에서 굶주린 백 성의 질병을 돌보며 전염병의 발생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고자 하였던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 고려의 대민 구료 정책은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 개경에 는 제위보 ( 濟危寶 ) 와 동서대비원 및 혜민국 ( 惠民局 ) 이 있어 백성과 빈민에 대 한 구휼 , 구료를 펼쳤다 . 성종대에는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 동왕 6 년 (987) 8 월에 12 목 (牧) 에 경학박사 (經學博士) 와 의학박사 (醫學博士) 를 파견하여 유학 및 의료 교육을 지속하고자 하였다 .87) 그 전해에 지방에서 올라온 학사 ( 學士 ) 가운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가 많아 귀향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을 돌려보냈 는데 ,88) 이들의 후속 공부를 도울 박사들을 파견하는 조치였다 . 이로 미루어 개경에 유학을 온 학생들은 유학과 의학을 수학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 이들 이 다시 고향으로 가서 학업을 이었다는 것은 의료 인력이 각 지방에 분산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 그러나 이들은 향리의 자제들로 , 향리직 (鄕吏職) 개정 에 따른 향호 ( 鄕豪 ) 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그 자제들을 관료 예비군 으로 천거받아 교육시킨 것이었다 .89) 이들이 지방의 거점에서 지방 의료를 담 당하였다고 하더라도 지역 구석구석까지 나아가 의술을 펼칠 수는 없었을 것 이다 . 의료 인력과 별도로 경향 각지에는 약점 ( 藥店 ) 이 설치되고 , 인정 ( 人丁 ) 의 크 기에 따라 약점사 (藥店史) 가 배치되었다 . 현종 9 년 (1018) 주부군현 (州府郡縣) 의 이직 (吏職) 을 개정할 때 새로 설치된 것이었다 .90) 이들은 공납 약재의 수취와 87) 고려사권 3, 세가 제 3, 성종 6 년 8 월 . 88)고려사권74, 지 제28, 선거2, 學校 , 國學 , 성종 5년. 89) 이경록 2010, 104-105 참조 . 90) 고려사권 75, 지 제 29, 선거 3, 銓注 , 鄕職 , 현종 9 년 .고려~조선 전기 불교계의 전염병 대응과 대민 구료 121 납부 및 국왕이 하사하는 약재의 관리 , 치료와 진휼을 담당하였다 . 약점사가 향직이기는 하나 생명과 관계되는 업무이기 때문에 , 의사는 아니더라도 의학 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 가운데에서 선발되어 지방 의료의 일부 를 담당하였을 것이다 .91) 조선시대에는 지방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각 도 에 의국 ( 醫局 ) 을 설치하고 의서를 보급하였으며 영주의 제민루 ( 濟民樓 ) 와 같은 공립 의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92) 이들과 더불어 지방의 의료 공백을 메워주었던 것이 지방에 분포하였던 사 찰들이었다 . 앞서 언급한 지념업 선사 조유의 경우에는 낙산사 주지로 있을 때 전염병을 물리쳐 사람들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 위기 상황에 지방에서는 사찰 들을 중심으로 지방의 구료 시스템이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 나아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자복사 (資福寺) 의 존재가 공백을 더 촘촘히 메워주는 역 할을 하였다 . 자복사란 각 행정단위의 읍내 즉 읍치 ( 邑治 ) 에 있었던 사원을 가 리킨다 .93) 입지 조건 상 전염병이라는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자복사는 지방의 치소 ( 治所 ) 와 연계하여 대응 활동을 펼쳤을 것이다 . 고려시대 자복사는 인왕 회 , 연등회 , 경행 등 국가적 불교의례의 지방 설행을 담당하고 경행을 위한 경 질 (經秩) 을 보관하였던 곳이기도 하였다 .94) 전염병 기양 의례 가운데 하나였던 가구경행의 지방 행사는 자복사를 중심으로 개설되었을 것이다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길거리에 시체가 널렸을 때 개 경 안에서는 동서대비원이 , 지방 단위에서는 영계관 ( 領界官 ) 이 조사하고 거두 어 묻도록 지정되어 있었다 .95) 여기에서 영계관은 계수관으로 해석되며 , 고려 사회에서 계수관이 사회 복지의 한 단위로서의 위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96)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더 자복사나 매골승의 존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계 91) 이경록 2010, 127; 孫弘烈 2013, 120-121 참조 . 92) 김호 2018 참조 . 93) 한기문 2011, 282. 94)앞의 논문, 297. 95) 고려사권 84, 지 제 38, 형법 1, 職制 , 문종 11 년 . 96) 구산우 2002, 244.122 불교학연구 제71호 수관과 함께 거론된 개경의 동서대비원은 조선의 활인서의 전신으로 , 조선 활 인서에는 매골승들이 소속되어 시체 매장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 나아가 계수 관의 일반 관원이 업무로서 시체 매장을 하였을 수도 있으나 , 계수관 단위 및 각 치읍에 자복사가 있었던 상황에서 소속 승려들을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크 다 . 이들 사찰에는 매골승들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장례 전문가로서 그들을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 한편 조선 태종 7 년 (1407) 에 자복사를 산수 좋은 곳에 있는 명찰들로 대체하 도록 하는 조처가 내려졌다 . 고려시대와 같이 자복사들이 읍소와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지방 의료 공백을 메웠던 방식의 대응은 조선시대에는 전개되기 어 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사찰들은 여전히 지방 의료 , 대민 의료에서 일정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 조선시대에 역병이 돌았을 때 사대부 들의 대처법 가운데 하나는 산사 ( 山寺 ) 로의 피신이었다 . 일례로 조선 전기에 김정국 ( 金正國 , 1485~1541) 은 중종 30 년 (1535) 10 월에 역병을 피해 고봉산성 ( 高 峯山城 ) 의 작은 암자에 들어갔다고 한다 . 절이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하 였으므로 전염의 가능성이 적었고 , 승려 가운데 의학에 밝은 사람들이 다수 있 었기 때문일 것이다 .97)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 지방의 자복사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의료 인프 라를 활용해 사람들을 구료하였을 것이다 . 특히 치소와 가까웠기 때문에 중앙 에서 모종의 전염병 시책이 내려왔을 때 유기적인 연계 대응이 용이하였을 것 이다 . 나아가 사찰에 머무는 승려들은 다라니를 외우고 의례를 개설하며 전염 병에 대처하였다 . 이러한 신앙 행위는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전염병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 동요하는 민심을 달래 주었을 것이다 . 97) 김호 1996, 32 참조 .고려~조선 전기 불교계의 전염병 대응과 대민 구료 123 V. 맺음말 어떠한 사회의 전염병 대응 방식은 그 사회의 경험과 지식 , 사유의 틀을 반 영한다 . 특히 인명을 상하게 하고 사회 불안을 야기하여 사회 구조를 흔들 수 있는 전염병에 대해서는 전방위적인 대응이 이루어졌다 . 유교 , 불교 , 도교 , 무 속 등 당시의 사유 속에서 효험을 기대할 수 있는 초월적인 권능에 기대어 기 원을 올렸고 , 의학적・제도적 대응도 병행되었다 . 고려 사회의 전염병 대응을 불교계에서만 했던 것이 아니며 , 비상 상황의 극복을 위하여 다양한 종교와 사 상 , 제도가 상호보완하며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불교 의 사회적 영향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불교적 대응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 이에 본고에서는 전염병 상황 하의 불교적 대응에 주목하였고 , 그것을 신앙 의 례 , 승려의 활동 , 사찰의 역할의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 우선 전염병이 발생하면 나라에서는 국가적 불교 의례를 개설하여 전염병 을 기양하고자 하였다 . 불교 신자가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점했던 고려 , 조선 전기 사회에서 불보살의 가피력에 기대는 것은 당연한 신앙심의 발로였다 . 나 아가 국가의 전염병 기양 노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다 . 반야도량 , 경행 , 마리지천도량 , 공작명왕도량 , 불정심도량 , 소룡도량 , 점찰회 , 수륙재 등이 개설되었다 . 나아가 신이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진언과 불부 (佛符) 를 활용하여 전염병을 막고자 하였던 개인적 노력도 확인할 수 있 다 . 「단온진언」 , 「퇴온부」 , 「온퇴부」 등이 그 예이다 .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구체적인 행동을 전개하는 것은 사람이다 . 승려들 의 활동은 전염병 퇴치 행적과 구호 행적 및 전염병 확산 방지 역할 등으로 나 타난다 . 고려시대의 조유는 주술로 전염병을 물리쳤고 , 혼원은 법력으로 전 염병을 물리쳤다고 한다 . 이들이 선사에서 대선사로 승계를 올려 받을 때 이 행적들이 거론된 점을 통해 , 당시 사회에서 승려들에게 기대하였던 바가 무 엇이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 한편 조선시대 탄선은 전염병 상황에서 사람 들을 구료하였다 . 그가 전염병을 물리치지는 못하였지만 의료 인력 혹은 의Next >